‘참기자’가 되겠다는 약속과 다짐
첫 출근 전날 일기장과 편지를 모두 읽었다. 서로 ‘참교사’, ‘참기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정직하고 양심에 떳떳한, 제가 가슴 뿌듯해 하며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기자가 되시길 바래요. 전 그렇게 믿구요” (94년 9월10일)
“항상 가지고 있는 신념으로 당당하게 세상에 서시고 그 신념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해요. 쉬운 일은 아닐테지요.” (94년 9월28일)
“훌륭한 기자가 꼭 되세요. 이 사회의 진정한 목소리가 되세요. 전 꼭 그럴 거라 믿어요. 그렇죠? 저도 교사에 대한 고민, 교육에 대한 생각 끊임없이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94년 10월8일)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절대로 변하지 마세요. 진실을 말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마음 절대로 잃지 마세요. 항상 올바른 것을 위해 싸우세요. 결코 세상의 안락과 타협하지 마세요. 그 순수하고 진실한 열정만큼은 절대 잃어선 안 돼요.” (94년 11월21일)
나는 이 약속만은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꼭 훌륭한 기자, 참기자가 돼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에 설테니 지켜봐 달라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준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성경구절이 적힌 메모를 명함집에 넣었다. 참기자가 되겠다는 내 의지였으며, 이후 내가 가야 할 이 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내 최종 목표는 ‘종합일간지’였기 때문에 우선 물류업계에서 최고가 되기로 했다. 기자의 자질과 능력, 영향력 등 모든 면에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또 업계에서의 영향력도 확대해 나갔다.
월간 ‘물류정보’에서 1년 4개월쯤 다니다 97년 4월쯤 ‘물류신문’ 창간멤버로 참여했다. 신생 언론사의 험난한 길이 예상됐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10월에 물류신문이 창간됐지만 그해 12월에 IMF가 터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언론사의 돈줄인 광고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대신 종이값과 인쇄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창간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신생매체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 영향으로 월급이 반토막이 나면서 개인적으로도 최대 위기상황에 놓이게 됐다.
당시는 누나집에서 독립해 신길동 주택의 반 지하에 살았는데, 이 위기를 어떻게든 이겨내야 했다. 그래서 한겨울에 보일러(기름) 한 번 켜지 않고 3만원짜리 전기장판 하나로 이겨냈고, 아침 저녁으로 찬물로 샤워하며 ‘헝그리 정신’으로 하루하루 버텼다.
하늘은 나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했다. 마치 참기자에 대한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물류신문은 창간하기 전 예비호를 두 번 냈는데, 97년 7월16일 창간예비호 1호 1면 머릿기사로 ‘중부권 내륙화물기지 입지 선정 의혹’을 전면 제기했다. 정부가 국책건설사업으로 충청남북도 지역에 약 40만평 규모의 물류기지를 추진하는데 이 사업에 정치권 등의 입김이 작용해 각종 비리로 얼룩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내가 썼는데 국가권력과 정치권력 등을 상대로 한 2년2개월 전쟁의 서막이다.
이때부터 나는 이 사건을 더 깊숙하게 파고들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후속보도를 내면서 공론화 시켰다. 99년 3월에는 현장 취재를 갔는데, 1위로 선정된 지역은 최악의 입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생존권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입지가 바뀌지 않으면 약 5천명의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가 불가피했다.
그런데도 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등 정치인, 지역 언론 등 누구도 주민 편이 아니었다. 이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이권에 개입해 있었다.
취재가 끝난 후 주민들은 나를 떠밀다시피 마을회관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내게 “제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 마을을 지켜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한참동안 주민들의 말을 듣고는 그들 앞에 섰고 “제 기자직을 걸고 여러분들의 생존권을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만약 이 엉터리 같은 정책이 바뀌지 않는다면 저도 기자생활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기자생활을 시작한 지 3년 밖에 안 된 기자. 그것도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전문지의 기자가 이미 정해진 국책건설사업을 바꾸고 마을주민들의 생존권을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따지고보면 불가능에 가까웠고 너무도 무모한 약속이었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정부, 정치권과 권력자들, 지방 권력, 국책연구기관 등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언론관이고 ‘정의로운 기자의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피할 수도, 타협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기자직을 걸고 ‘배수의 진’을 쳤다.
나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각오로 싸웠고, 계속해서 권력자들의 이권개입, 국책연구기관의 엉터리 용역 등을 폭로했으며, 국회를 움직여 상임위원회 주요 안건으로 채택시키는 등 여론을 완전히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층의 압력과 협박, 살해위협이 있었으나 물류신문도, 나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라”고 지시했고, 주무부처인 건교부는 ‘완전 백지화,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다. 재입지선정 과정을 거쳐 1위 후보지는 3위로 밀려나면서 5천명 주민들의 생존권도 지킬 수 있었다. 나는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국내 역사상 이미 확정된 국책건설사업이 완전히 뒤바뀐 최초의 사례이며, 그걸 이름없는 전문지 기자인 내가 해낸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깬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례는 펜을 가진 기자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직접 보여준 것에 의미가 있었다.
나는 이게 내 기자 인생에서 가장 큰 싸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싸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민들 피빠는 거대 사기조직과의 전쟁이다. 이번에는 ‘칼을 맞거나 수갑차거나 둘 중 하나는 각오해야겠구나’라며 목숨을 걸어야했고, 나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또다시 혼자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매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엄청난 돈을 제시하는 회유. 심지어 대낮에 조폭들이 회사에 찾아오고, 대학원 다닐 때는 나를 위해하려고 밤에 학교 정문에서 조폭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추격전을 벌였는데, 그 싸움이 3년이나 계속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지입제 폐지’를 선언하면서 내 전쟁도 끝이났다.
나는 혼자 범죄조직과 싸우면서 그들의 실체를 계속해서 폭로해나갔고, 한 명의 피해자라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칼을 맞지는 않았지만 ‘죄형법정주의’를 어긴 죄목으로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고 국가에서 ‘전과자’라는 훈장을 받았다. 반면 언론계에서는 ‘바보 기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는 지금까지 참기자의 길을 걸었고, 항상 힘없고 올바른 약자들 편에 서서 싸웠다. 누구보다 치열했고, 열정적이었으며, 파란만장한 기자생활을 보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정의로운 길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신념이 꺾이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참기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자직도 걸고 목숨도 걸고 모든 것을 던졌다.
그렇다고 입신영달을 꾀하거나 자리에 연연하거나 안락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내게 이런 길을 가게 해준 것은 그 사람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는 내 정신적 지주였고, 나를 바른 길로 이끌었다. 숱한 어려움과 위기속에서도 나를 지켜줬다.
단언컨데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이런 길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람의 희생과 아픔, 상처가 나를 참기자로 거듭나게 했다. 그 위험한 불길속으로 혼자 뛰어들 수 있었던 용기의 밑바탕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참교사’. ‘참기자’가 되자고 약속했던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