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2인자 장성택 처형사건
그날 평양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고사총 비명 속에 화염방사기까지
북한 권력서열 2인자였던 장성택의 제거작업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김정은은 고모부인 장성택을 바로 치지 않고, 그의 손과 발을 먼저 잘라냈다.
2013년 11월 중순,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행정부 부부장 리룡하와 장수길이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 요원들에게 체포된다.
이들은 얼마 후 주군인 장성택이 보는 앞에서 고사총으로 처형됐다는 것이 정보당국과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처형 방식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위성 사진에 포착된 강건군관학교의 대공화기 배치 정황 등은 이러한 잔혹한 처형설을 뒷받침한다.
장성택은 이때 비로소 위기감을 느꼈으나 이미 자신의 연락망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심복들이 처형된 후 장성택은 사실상 평양 자택에 연금됐다. 김정은은 대외적으로 아무일 없는 듯 행동하며 장성택의 동태를 살폈다. 그사이 보위부를 동원해 장성택 라인을 모두 체포하고, 모든 통신을 장악해 손발을 완전히 묶었다.
측근 리룡하·장수길의 처형과 고립
12월 초 김정은의 직속 호위부대 내에서도 가장 충성심이 높은 이른바 ‘918호실’ 요원들이 장성택의 자택을 급습했다. 체포 당시 장성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요원들을 보고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대느냐”며 호통을 쳤으나, 요원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를 제압해 끌어냈다. ‘왕재상’의 권위가 무너지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12월 8일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 도중 보위부 요원들이 들어와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남자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 끌고 나갔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북한의 실권자’, ‘왕재상’으로 불리며 김정은의 옆자리를 지켰던 장성택(67)이었다.


이 장면은 장성택을 회의 도중 체포한 것처럼 보인 ‘공개 처형’식 연출이며, 이례적으로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주민과 전 세계에 공개됐다. 이는 단순한 숙청을 넘어, “누구든 수령의 권위에 도전하면 대중 앞에서 치욕스럽게 끌려 나간다”는 메시지를 시각화한 고도의 공포 마케팅이었다. 장성택에게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4일 후인 12월12일, 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에 장성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눈에 봐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헝클어진 머리, 피멍이 든 눈가, 굽어버린 어깨, 양손은 수갑에 묶였고, 군복입은 보위부 요원들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 들어온 그의 초췌한 얼굴 곳곳에는 고문과 구타의 흔적이 선명했다.

북한의 로열패밀리이자 최고 권력자의 후계 시절 후견인이, 조카의 명령 한 마디에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 번의 재판으로 사형 선고 후 즉각 집행
숙청은 전격적이고 잔혹했다. 이날 단 한 번의 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됐고, 판결문에는 “개만도 못한 인간쓰레기 장성택은 당과 국가의 지도권을 찬탈할 흉악한 야망을 품고…”라고 적혀 있었다. 판결 직후 사형은 즉각 집행됐다.
장성택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은 평양을 넘어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당초 교수형이나 일반적인 총살형으로 알려졌으나, 정보당국과 내부 소식통들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는 훨씬 잔혹했다.
대공화기인 고사총(ZPU-4)이 동원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14.5mm 대구경 탄환이 쏟아지는 고사총은 사람의 형체를 아예 지워버릴 만큼 파괴적이다. 일각에서는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소각했다는 ‘본보기식 처형’ 가능성도 제기했다. 김정은은 이 잔인한 과정을 당 고위 간부들에게 참관케 했다. “누구든 내 권위에 도전하면 이렇게 된다”는 무언의 공포 정치를 극대화한 것이다.
김정은은 왜 고모부이자 후견인인 장성택을 잔혹하게 처형했을까.
사건의 발단은 ‘권력의 속성’ 그 자체였다.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 어린 김정은을 보좌하며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노동당 행정부장으로서 국방위 부위원장까지 겸임하며 인사와 외화 벌이 사업을 한 손에 쥐었다. 군부와 내각 모두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태양은 둘일 수 없었다. 장성택을 따르는 무리가 늘어날수록 김정은의 불안감은 증폭됐다. 이른바 ‘건성건성 박수’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김정은이 연설할 때 건성으로 박수를 치거나, 그가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될 때 건들거리며 서 있던 장성택의 태도는 어린 지도자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도전으로 읽혔다. 이는 수령의 절대권위를 명문화한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로, 숙청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권력의 역린을 건드린 ‘돈’과 ‘하극상’
장성택 처형의 결정적 배경에는 단순한 예우 문제를 넘어 ‘돈’과 ‘명령 체계’가 뒤엉킨 치명적인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핵심 외화 벌이 사업, 특히 석탄과 철광석 등 대중(對中) 자원 수출 이권은 장성택이 수장으로 있던 노동당 행정부 산하 ‘54국’이 거머쥐고 있었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 통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 이권들을 군부나 당의 다른 기관으로 분산·통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장성택의 측근들은 최고지도자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장 부장의 비준(승인) 없이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며 정면으로 버텼다. 김정은의 명령이 고모부라는 거대한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장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결정적인 도화선은 이른바 ‘서해 수산물(게·조개) 이권 분쟁’이었다. 외화가 즉각 확보되는 황금 어장 채취권을 두고 장성택 측 요원들과 김정은의 직속 군부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을 넘어선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하극상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만취한 상태에서 통곡하며 “이건 명백한 반역이다. 내 명령보다 장 부장의 말이 더 먹히는구나”라고 절규했다는 비화가 평양 고위층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결국 장성택이 구축한 방대한 경제적 성채는 김정은에게 단순한 비효율을 넘어 ‘지휘권에 대한 도전’으로 읽혔다. 실제로 처형 판결문에 적시된 “나라의 귀중한 자원을 헐값에 팔아치운 매국 행위”라는 표현은, 장성택을 경제 실책의 희생양으로 삼는 동시에 그가 장악했던 자금줄을 몰수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더욱이 장성택이 중국과의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비자금 중 일부가 마카오 등지에 체류하던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생활비와 경호비로 후원되었다는 첩보는 김정은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장성택은 중국식 개방 모델을 옹호하며 중국이 가장 신뢰하는 ‘북한 내 창구’였으나, 그 밀착 관계가 오히려 ‘잠재적 킹메이커’라는 독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측근 궤멸과 지워진 혈통들
장성택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권력자의 분노는 당사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곁가지’를 쳐낸다는 명목 아래 장성택의 수하는 물론 그의 일가까지 처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먼저 그의 측근이었던 장수길, 리룡하가 공개 처형됐고, 그가 수장이던 행정부는 공중분해됐다.
형제와 친인척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성택의 두 형(장성우, 장성길)은 이미 사망했으나, 그들의 자손들과 친인척들은 대부분 수용소로 압송되거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택의 조카인 장용철 주말레이시아 대사와 매제인 전영진 주쿠바 대사는 평양으로 소환된 뒤 처형되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이처럼 장성택의 흔적을 지우는 ‘기록 말살형’과 연좌제가 동시에 진행됐다.
장성택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유일한 여동생, 김경희의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다. 남편이 ‘개만도 못한 인간쓰레기’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김경희가 남편의 처형에 동의했다는 설과 중병으로 실권을 잃어 처형에 개입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 팽팽했는데, 최근 연구와 증언에 따르면 김경희는 단순히 ‘방관자’가 아니라, 장성택의 방탕한 생활과 권력욕이 ‘백두혈통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판단해 숙청에 동의하거나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처형 직후 그녀는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독살설, 뇌졸중 사망설 등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녀는 6년이 지난 2020년에야 김정은의 옆자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초췌해진 얼굴로 조카의 박수에 호응하는 그녀의 모습은, 남편을 잃고 권력의 화단에 갇힌 ‘박제된 로열패밀리’의 비애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피로 쓴 교훈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장성택은 처형 전 재판에서 “모든 것은 내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고 전해진다.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는지, 마지막 순간의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사라진 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권력의 꿀은 달콤했으나 그 대가는 멸문지화(滅門之禍)였다.
장성택의 몰락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피보다 진한 것이 권력인가, 아니면 권력 앞에서 인간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가. 지금의 북한은 장성택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냈지만, 그가 처형되던 날 평양에 울려 퍼졌던 고사총의 굉음은 여전히 북한 엘리트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공포의 이정표로 박혀 있다.
권력을 쥐기 위해 혈육을 베어낸 역사는 반복되었고, 그 잔혹한 승리의 대가로 김정은은 ‘완전한 고립’ 속의 ‘완전한 통제’를 얻어냈다.
권력의 단맛과 핏빛 종말
장성택은 누구인가
평양의 로열패밀리 안에서 ‘조카의 고모부’이자 ‘수령의 사위’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나이. 장성택의 삶은 그 자체로 북한 권력 암투의 현대사다.
장성택은 1946년 1월 22일, 강원도 천내군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함경북도 청진 출생이라고도 한다.) 그는 외모가 준수하고 머리가 영특한 수재였다. 북한 최고의 명문인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의 운명을 바꾼 여인, 김일성의 장녀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를 만난다.
장성택은 예술적 끼가 다분했다. 아코디언을 잘 켰고 입담이 좋아 김경희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평범한 집안 출신인 장성택을 사위로 맞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김경희와 떼어 놓기 위해 장성택을 강제로 지방(강원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키기까지 했다.

김경희의 사랑은 지독했다. 그는 주말마다 직접 차를 몰고 원산까지 내려가 장성택을 만났고, 결국 김일성도 딸의 고집에 손을 들었다. 1972년, 장성택은 마침내 김일성의 사위가 되며 권력의 핵심인 ‘로열패밀리’에 입성한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신뢰를 바탕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김정일의 화려한 사생활을 관리하는 ‘기쁨조’ 조직과 비밀 파티를 주관하며 김정일의 가장 가까운 ‘술동무’이자 충복으로 자리매김했다.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당 행정부장 등을 거치며 인사권과 정보권, 외화 벌이 사업을 한 손에 쥔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직전, 어린 아들 김정은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훈을 남기면서 장성택은 명실상부한 ‘섭정왕’의 지위에 오른다. 김정은의 뒤에서 모든 국정을 지휘하며 북한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한 시기였다.
장성택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그의 방탕한 사생활이다. 처형 당시 판결문에 “부화타락한 생활을 했다”는 표현이 명시될 정도다. 장성택은 외화 벌이를 통해 확보한 막대한 비자금으로 평양의 비밀 안가에서 호화 파티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예술단 여배우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는 평양 고위층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와 사생활 문제는 김경희와의 관계를 파탄 냈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딸이었던 장금송이 2006년 프랑스 유학 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집안에서 반대하자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해외 순방 중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하거나, 측근들과 마약을 복용했다는 혐의 또한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됐다.
장성택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돈, 권력, 그리고 사람. 그가 거느린 측근들이 김정은의 명령보다 장성택의 한마디에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정은은 고모부의 ‘방탕한 사생활’과 ‘권력 찬탈 음모’를 묶어 그를 처단했다. 2013년 12월, 평양의 권력 지도를 독식하려 했던 이 사나이는 자신이 세운 왕좌 아래서 가장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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