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

육군 제53사단 장교 무장 탈영사건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군대는 거대한 전환점 위에 서 있었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사회 전반에는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졌지만, 철책 너머 병영 안쪽은 여전히 ‘쌍팔년도’식 고질적 부조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계급장보다 ‘짬밥’을 우선시하는 사적 서열 문화,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신세대 장병들의 유입. 여기에 이 갈등을 조율하지 못한 지휘권의 무능이 뒤섞이며 군 내부는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뇌관이 터지고 말았다.

새벽의 총성, “장교가 총을 들고 사라졌다”

1994년 9월 27일 새벽 2시 40분. 경남 울산시 강동면(현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에 위치한 육군 제53보병사단 127연대 해안 소초.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할 시각,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총성이 허공을 가랐다.

공포탄 3발. 총성을 울린 주인공은 적군도, 무장공비도 아니었다. 바로 해당 소초의 소대장인 조한섭 소위(25·학군 32기)였다. 그의 왼손에는 안전핀만 뽑으면 언제든 터질듯한 수류탄이, 오른손에는 실탄이 장전된 M16 소총이 들려 있었다. 눈이 뒤집힌 소대장의 모습에 내무반에서 뛰쳐나온 소대원들은 얼어붙었다.

“따라오는 새끼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조 소위의 일갈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황정희 하사(23)와 공모해 소초 내 통신선을 절단한 상태였다. 이들은 소총 2정과 수류탄 6발, 실탄 80여 발을 챙겨 황 하사 소유의 프레스토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창군 이래 전례가 없던 ‘현역 장교와 하사관(부사관)의 공모 탈영’이라는 비극적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탈영병 일행은 약 6km 떨어진 평화주유소 인근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김특중 소위(23·육사 50기)를 태웠다. 김 소위는 조 소위와 탈영을 사전에 모의했으나 마지막 순간 망설였다.
그는 사건 전날 밤 부대 전령이자 방위병인 윤종천 상병(21)과 함께 시내에서 소주 3병을 마시고 새벽 2시쯤 귀대했다. 숙소에서 탈영 준비를 한 다음 중대장실에서 M16 소총을 훔쳐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던 것이다.

육사 출신 엘리트 소대장과 학군 출신 소대장, 그리고 하사관이 의기투합해 ‘군’이라는 거대 조직을 등진 것이다. 이들은 양산군 원동면 태봉마을 일대 야산으로 숨어들며 군 당국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9시간의 대치와 ‘자폭’ 직전의 투항

사건 직후 군경은 발칵 뒤집혔다. 민주화 열기가 거세던 문민정부 초기에 발생한 장교 무장 탈영은 단순한 군기 사고를 넘어 정권의 안보 역량을 시험하는 잣대가 됐다. 53사단은 즉각 중대본부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부대원 4000여 명을 완전 무장시켜 투입했다. 울산 전역에는 검문검색이 강화됐고, 헬기가 상공을 가르며 투항을 권고했다.

군경은 또 김 소위의 연고지인 서울과 조 소위, 황 하사의 연고지 등에 수사관을 보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조 소위와 황 하사의 아버지를 수색현장에 들여 보냈다.

추격전은 처절했다. 조 소위와 김 소위는 도주 9시간 만인 오후 1시 20분경, 인근 음식점에서 부대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린 뒤 수색대에 투항했다. 부대 전입 동기였던 두 사람이 느꼈던 압박감과 현실적 한계가 투항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황 하사는 달랐다. 그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산속을 헤매며 저항했다. 자신을 쫓는 수색대 차량을 향해 실탄을 발사해 타이어를 펑크 내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했다. 황 하사가 버리고 간 차량에서는 부모와 여자친구에게 남긴 “자살하고 싶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군 조직에 대한 배신감과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절망이 뚝뚝 묻어나는 글귀였다.

도주 4일째인 9월 30일 저녁, 천황산 900고지에서 황 하사는 마지막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채 대치했다. 한 발을 계곡으로 던지며 자폭 의사를 비쳤으나, 군 관계자와 가족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수류탄을 내려놓았다. 4일간 대한민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장교들의 반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소대장 길들이기’라는 괴물

세상은 경악했다. “어떻게 장교가 병사를 버리고 총을 들 수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군 내부의 실상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참혹했다. 이들의 탈영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썩을 대로 썩은 병영 부조리에 대한 ‘목숨을 건 고발’이었다.

당시 부대 내에는 ‘소대장 길들이기’라는 악습이 독버섯처럼 퍼져 있었다. 이른바 ‘짬밥’으로 불리는 복무 기간이 계급보다 우선시되는 역전 현상이 심각했다. 병장들은 갓 부임한 소위들에게 경례를 거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면전에서 반말을 내뱉었다.

심지어 소대장이 보는 앞에서 신병을 구타하며 권위를 능멸했고, 소대장실을 휴게실처럼 드나들며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셨다. 소대장이 훈계하면 “대학 다니다 온 새끼가 뭘 아느냐”는 식의 조롱이 돌아왔다. 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지휘권이 병사들의 ‘짬밥’ 앞에 무력화된 상태였다.

사건의 결정적 도화선은 탈영 한 달 전인 8월 23일에 있었다. 인근 소초의 이아무개 소위(학군 32기)가 신병을 구타하던 신아무개 병장을 제지하자, 신 병장은 “때리라면 못 때릴 줄 아느냐”며 소대장의 뺨을 수차례 후려쳤다. 동료 병사들까지 가세해 소대장을 집단 구타하는 전대미문의 하극상이 벌어졌다.

조직적 은폐와 ‘영창 15일’의 비극

더욱 절망적인 것은 지휘부의 대응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 소위가 중대장 김 대위에게 보고했지만, 돌아온 답은 냉담했다. “조용히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부대 실적과 자신의 진급에 오점이 남을 것을 우려한 중대장은 사건을 은폐하려 급급했다.

소대장들이 연대장에게까지 항의하며 강력 처벌을 요구했으나, 부대는 상관 폭행죄가 아닌 단순 ‘지시불이행’ 혐의를 적용해 신 병장에게 영창 15일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데 그쳤다.



이를 지켜본 조 소위와 김 소위는 극단적인 무력감에 빠졌다. “장교가 병사에게 두들겨 맞아도 군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정상적인 보고 체계가 마비된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걸고 ‘무장 탈영’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통해 세상에 이 부조리를 알리기로 결심했다.

사건 이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철저한 조사와 엄중 처벌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지휘계통에 있던 간부들과 하극상 가담 병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고, 해당 부대 병사와 간부 등 29명이 구속되는 사태로 번졌다.

재판 과정에서도 군의 구조적 결함은 쟁점이 됐다. 1심 보통군사법원은 조 소위와 김 소위에게 징역 7년, 황 하사에게 징역 10년, 소대장을 폭행한 신 병장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며 엄벌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2심 고등군사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이들이 일반 범죄 목적이 아닌, 하극상에 항의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킨 점을 참작했다. 군 당국이 하극상을 방치해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책임이 크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탈영 장교들의 형량은 징역 2년으로 대폭 감경됐다. 반면 하극상을 주도한 병사들에게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며 2~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밖에도 보고를 묵살해서 직무유기로 기소된 중대장 등 대위 2명은 징역 1년, 소대장이 훔친 수류탄을 보관한 혐의로 기소된 윤 상병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군 개혁의 신호탄이 되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군 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국방부는 부사관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계급장 형상을 변경했으며, 2001년에는 ‘하사관’이라는 명칭을 ‘부사관’으로 고쳤다. 하극상의 온상이었던 영창 제도를 개선해 영창 기간만큼 복무 기간이 늘어나도록 법령을 개정하기도 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1994년의 그 소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김특중 소위는 수감 생활 후 복권되어 현재는 수험생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사건이 던진 본질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군대는 계급과 명령으로 유지되는 조직이지만, 그 기저에는 상호 존중과 신뢰라는 ‘인간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지휘권이 실적과 안일에 가로막혀 제 기능을 못 할 때, 군대는 언제든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그들은 몸소 증명했다.


최근에도 불거지는 간부와 병사 간의 갈등, 그리고 지휘권 약화 논란은 30년 전 ‘프레스토’를 타고 부대를 탈출했던 그들의 절망과 닮아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군의 기강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시스템과 상호 존중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여전히 학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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