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초자연현상

핏빛으로 물든 ‘케네디 가문’의 잔혹한 연대기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잔혹했던 가문, 케네디가(The Kennedys)의 연대기는 영광과 비극이 기묘하게 얽힌 잔혹 동화와 같다. 수많은 암살, 사고, 의문의 죽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케네디 가문의 저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1961년 1월 20일, 워싱턴 D.C.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제3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F. 케네디(JFK)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과 우아한 영부인 재클린, 그리고 아이들이 백악관을 누비던 시절을 사람들은 전설 속 왕국 ‘카멜롯’에 비유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 뒤에는 오래전부터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가문의 수장 조셉 P. 케네디는 자식들을 권력의 정점에 세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1등이 아니면 패배자”라는 강박적인 집념은 보이지 않는 업보가 되어 자손들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세간에는 과거 조셉이 반 유대주의 발언과 고립주의 주장으로 정치적 생명줄이 끊기자, 아들들을 도구로 삼아 대리만족을 꾀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196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다음 날,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자택에 모여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연쇄되는 죽음의 고리’ 멈추지 않는 비극적 운명

비극의 서막은 가문의 장남이자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조셉 주니어였다. 1944년 8월 12일, 29세의 해군 비행사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아프로디테 작전’이라는 위험천만한 비밀 임무에 자원했다. 폭탄을 가득 실은 무인 비행기를 유도하다 탈출하는 임무였으나, 기체는 원인 모를 결함으로 공중에서 폭발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가문의 첫 번째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1948년, 넷째이자 차녀인 캐슬린 케네디(28) 역시 프랑스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떠난 여행길이 영원한 이별의 길이 된 것이다. 가문의 기둥들이 연달아 하늘에서 스러져 가자, 사람들은 이 화려한 가문의 뒤편에 흐르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가장 비참한 것은 셋째 딸 로즈마리의 운명이었다. 가문의 명성에 오점이 될까 두려워했던 아버지 조셉은 1941년, 지적 장애와 감정 기복을 앓던 23세의 딸에게 전두엽 절제술을 강요했다.
아내 로즈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진행된 이 수술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로즈마리는 유아 수준의 지능으로 전락해 평생 시설에 격리되었다. 이는 죽음보다 더 차가운 생매장이자,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린 가문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한다.

가장 잔혹한 드라마는 1960년대에 펼쳐졌다.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텍사스주 달라스의 엘름 스트리트 딜리 플라자. 46세의 대통령 JFK는 오픈카를 타고 퍼레이드 중이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울려 퍼진 세 발의 총성. 재클린의 분홍색 정장은 남편의 선혈로 얼룩졌고, 전 세계는 실시간으로 목격한 이 잔혹한 드라마 앞에 얼어붙었다.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배후를 둘러싼 음모론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8년 6월 5일, 형의 뒤를 이어 가문의 기둥이 된 로버트(바비)는 1968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며 다시 한번 카멜롯의 부활을 꿈꿨다. 그러나 6월 5일, 로스앤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승리 연설을 마치고 주방 통로를 지나던 42세의 바비는 팔레스타인계 청년 서한 비슈하라 서한의 총탄에 쓰러졌다. “모두 무사한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는 형의 곁으로 떠났다.

가문의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는 형들의 비극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었다. 1969년 7월 18일 밤, 매사추세츠주 채퍼퀴딕 섬에서 그는 차를 몰고 가다 다리 아래 물속으로 추락했다.



에드워드는 탈출했으나, 동승했던 28세의 비서 메리 조 코페크네는 차 안에서 익사했다. 의아한 것은 에드워드는 사고 직후 신고하는 대신 현장을 떠나 호텔로 돌아감 잠을 잤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사고 후 9시간이나 신고를 지체했다. 이로인해 그는 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었고, 대권을 향한 꿈도 영원히 앗아갔다. 죽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은 물론 가문의 도덕적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비극의 화살은 다음 세대마저 비껴가지 않았다. 1999년 7월 16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이자 ‘미국의 아들’로 불렸던 존 F. 케네디 주니어(38)는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사촌의 결혼식으로 향하던 중 매사추세츠주 마서스비니어드 앞바다에 추락했다. 이 사고는 가문의 마지막 황태자가 맞이한 허망한 종말이었다.

짙은 안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는 아내와 처형을 태운 채 차가운 대서양 심해로 가라앉았다. 수색 끝에 인양된 기체 잔해는 케네디 가문의 황태자가 맞이한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 외에도 가문의 일원들은 약물 과다복용, 스키 사고, 자살 등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떠났다.

‘끝나지 않은 장례식’ 저주는 실재하는가

케네디 가문의 비극은 단순히 ‘운’으로 치부하기엔 그 빈도가 가혹하다. 2020년에도 로버트 케네디의 손녀와 증손자가 보트 사고로 사망하는 등 비극의 그림자는 여전히 가문 주변을 맴돈다.

학자들은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구조적 요인으로 승리를 향한 강박과 위험을 즐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과잉이 가문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시각이다. 역사적 요인으로는 냉전과 민권 운동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정의를 외치며 전면에 나섰던 가문의 숙명적 충돌이었다는 것이다.



대중의 눈에 비친 케네디가는 그리스 비극 속 영웅들처럼, 신의 영역(절대 권력)에 도전했다가 처참한 대가를 치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다. 카멜롯의 전설은 피로 쓰였고, 이제 남은 것은 화려했던 명성의 잔해와 풀리지 않는 의문뿐이다. 케네디 가문의 역사는 곧 미국의 가장 찬란하고도 잔인했던 이면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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