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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한 10명의 선원들 ‘메리 셀레스트호’ 유령 항해


1872년 11월 초, 뉴욕 이스트 강 피어 16번 부두. 차가운 늦가을 바람이 항구의 돛대 사이를 날카로운 비명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당시 뉴욕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역의 심장이었고, 수많은 범선이 석탄과 설탕, 그리고 산업용 원료를 싣고 기회의 땅 유럽으로 향하던 시대였다. 증기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바다의 주인공은 거대한 흰 천을 펼친 범선들이었으며, 선원들에게 바다는 경외와 공포가 공존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항구 한쪽에서는 282톤급의 튼튼한 2돛박이 범선 메리 셀레스트(Mary Celeste)호가 출항 준비로 분주했다. 선체는 갓 칠한 페인트로 반짝였고, 창고에는 산업용 알코올 1701배럴이 가득 채워졌다.

이 배의 키를 잡은 이는 벤저민 브릭스(Benjamin Briggs, 37세) 선장이었다. 그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자, 술을 멀리하고 성경을 탐독하는 엄격한 청교도적 인물이었다.

이번 항해는 그에게 특별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 브릭스(Sarah Elizabeth Briggs, 31세)와 겨우 두 살배기 딸 소피아(Sophia Matilda Briggs, 2세)를 데리고 가는 가족 여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실에는 아내의 재봉틀과 딸아이의 장난감, 그리고 가족이 함께 연주할 멜로디언이 실렸다.

실제 메리 셀레스토호와 선장, 그의 가족들.

축복 속에 떠난 항해, 그리고 끊긴 기록

11월 7일. 메리 셀레스트호는 뉴욕 항의 마천루를 뒤로하고 이탈리하 제노바를 향해 돛을 올렸고, 대서양의 짙은 푸른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선장 가족 외에도 7명의 정예 선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숙련된 전문가들이었으며, 선장과의 불화도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 5일 오후 1시쯤, 대서양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사이 해상에서 영국 범선 ‘델 그라티아(Dei Gratia)’호의 조타수는 수평선 너머에서 기묘하게 흔들리는 배 한 척을 발견한다. 돛은 반쯤 찢긴 채 바람에 무의미하게 펄럭였고, 배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생명체처럼 갈지자로 비틀대며 파도를 타고 있었다.


델 그라티아호의 모어하우스 선장은 망원경을 들었다. 눈에 익은 배였다. 바로 한 달 전 뉴욕에서 함께 식사하며 우정을 나눴던 친구 브릭스 선장의 메리 셀레스트호였다. “브릭스! 응답하라!” 모어하우스 선장의 외침은 공허한 파도 소리에 묻혔다. 배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사람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이윽고 구토를 유발할 정도의 정적이 흐르는 갑판 위로 델 그라티아호의 선원들이 발을 디뎠다. 그것은 해양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섬뜩한 미스터리의 서막이었다.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자들’ 박제된 시간의 공포

수색팀을 이끈 일등 항해사 올리버 데보는 배에 올라탄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배 안은 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었던 것처럼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버려진 배의 모습이라기보다, 누군가가 마법에 걸려 한순간에 증발해버린 ‘정지된 시간’의 전시장에 가까웠다.

수색팀이 선실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준비된 아침 식사였다. 탁자 위에는 찻잔과 먹다 남은 오트밀, 그리고 껍질을 까다 만 삶은 달걀이 놓여 있었다.
선장실 한쪽에는 아내 사라가 쓰던 재봉틀 위로 바느질하던 천이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고, 바늘은 마치 다음 땀을 뜨기 직전 멈춘 듯 날카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떤 침입의 흔적도, 반항의 몸부림도 없었다. 마치 저녁 식사 기도를 하듯 평온한 상태에서, 단 1초 만에 10명의 생명이 공기 중으로 녹아내린 것 같은 기괴함이었다.


더욱 소름 끼치는 사실은 선원들의 소지품이었다. 당시 선원들에게 목숨만큼 소중했던 ‘급료’가 든 돈상자와 개인 소지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선원들의 유일한 안식이었던 파이프 담배와 성냥이 각자의 관물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는 점은 해상 전문가들을 경악게 했다. 베테랑 선원이 배를 버릴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담배와 식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한 채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배의 상태는 항해에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양호했다. 펌프실의 물도 1m 남짓으로 위험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6개월 치의 식량과 식수는 오염되지 않은 채 가득 차 있었다. 단 하나, 선미에 매달려 있어야 할 구명정 한 척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그 구명정을 내린 방식이었다. 정상적인 퇴선 절차라면 활대에 밧줄을 걸어 천천히 내렸어야 했으나, 구명정을 연결했던 밧줄은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베어낸 듯 끊어져 있었다.

잔혹한 가설과 어긋나는 퍼즐

사건 이후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10명의 동시 실종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했다.

당시 항해 일지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거대 대왕오징어나 크라켄의 습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선원들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배의 외벽에는 어떤 충격 흔적도 없었다.

선실 벽에서 핏자국으로 의심되는 흔적과 칼자국이 발견되면서 해적 습격이나 반란설이 제기되었으나, 정밀 조사에서 혈흔이 아닌 녹물과 단순한 나무 흠집으로 밝혀지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선원들의 귀중품도 그대로 있어 비현실적이었다.

갑작스러운 해상 용오름이 배를 덮쳐 선원들이 공포에 질려 탈출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당시 기상 기록과 일부 일치하지만, 왜 10명 전원이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심해의 저주라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이 가설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만약 대피를 했다면 왜 선장은 가장 중요한 항해 장구(섹스턴트, 크로노미터)를 챙기지 않았는가? 왜 그는 740km나 떨어진 육지를 향해 노도 없이 나아갔던 것일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화물칸의 ‘알코올 유출’이다. 배 밑바닥에 실린 1701배럴 중 9배럴이 비어 있었다. 뜨거운 날씨에 기화된 알코올 가스가 팽창하며 폭발적인 소음을 냈고, 브릭스 선장은 배가 곧 폭발할 것이라는 공포에 질려 가족과 선원들을 구명정으로 대피시켰다는 것이다.
브릭스 선장은 이전에 알코올 화물을 운반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기화된 알코올 가스가 내는 ‘쉿’하는 소리를 배가 곧 폭발할 징후로 오판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배에는 화재나 폭발의 흔적이 전무했다.

조사 결과, 메리 셀레스트호의 선원들은 구명정에 옮겨 탄 뒤 배와 연결된 밧줄이 끊어지면서 망망대해로 떠내려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졌다. 선원들이 배 옆에 구명정을 띄워놓고 가스가 빠지기를 기다리던 중,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나 파도로 인해 연결 로프가 끊어지면서 본선(메리 셀레스트호)은 바람을 타고 멀어지고, 노가 없던 구명정은 표류하게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숙련된 브리그스 선장이 배를 버려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아조레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 진실

1873년 지브롤터 해사 재판소는 수개월간의 조사 끝에 “설명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한 실종”이라는 허망한 판결을 내렸다. 배는 멀쩡했으나 그 안에 타고 있던 10명의 영혼은 대서양의 푸른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막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탄 구명정은 단 한 조각의 파편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대서양의 차가운 물속으로 침몰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안개 낀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메리 셀레스트호는 이후 ‘저주받은 배’라는 오명 속에 13년 동안 17번이나 주인이 바뀌었고, 주인들마다 파산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불행을 겪다 1885년 아이티의 산호초에 부딪혀 난파되며 최후를 맞이했다. 배의 잔해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영원한 미스터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묻는다. 1872년 11월 25일 오전 8시, 항해일지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 직후, 그 평화로운 아침 식사 시간을 깨뜨린 ‘절대적인 공포’는 무엇이었을까? 브리그스 선장은 무엇을 보았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그 좁고 위태로운 구명정에 몸을 실었는가.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이제 오직 말이 없는 대서양의 파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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