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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에게 거액 빌려주고 4745일 침묵한 ‘배우 신하균’


“돈 앞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도 남이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민감한 것이 바로 ‘돈거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이 오가는 순간 관계에는 미묘한 균열이 생기고, 약속된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는 의심으로, 고마움은 불편함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에서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침묵’과 ‘기다림’으로 서로의 자존심을 지켜준 두 배우가 있다. 바로 이정은과 신하균의 이야기다.

대학로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절박했던 ‘전대녀’ 이정은

2000년대 초반, 대학로의 공기는 유독 매서웠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해 10년 넘게 무대를 지켜온 배우 이정은은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했지만, 막이 내린 뒤 마주하는 현실은 가혹했다.

연간 수입이 고작 20만 원에 불과했던 그녀는 직접 연출을 맡았던 연극의 제작비 문제로 억대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 힘든 처지의 스태프와 동료 배우들의 인건비만큼은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었다. 낮에는 마트에서 12시간씩 간장을 팔며 ‘판매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고, 밤에는 무대에 올랐다.


항상 허리춤에 마트 시재(현금)를 담은 가방인 ‘전대’를 차고 다녀 ‘전대녀’라 불리던 그녀에게, 동료들의 생계가 걸린 절박한 순간이 닥쳤다. 주변에 손을 내밀었지만 모두가 고개를 젓던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얼굴이 스쳤다.

“왜?”라고 묻지 않은 입금

자존심보다 절박함이 앞섰던 그날, 이정은은 평소 과묵하지만 심성이 깊기로 유명했던 후배 배우 신하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균아, 미안한데… 내가 정말 급해서 그러는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을까?” 거절의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찰나, 신하균의 대답은 간결했다. “알았어. 계좌번호 보내줘.”

당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등을 통해 이미 ‘하균신(神)’이라 불리며 충무로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돈의 용도를 묻지도, 언제 갚을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선배이자 동료인 이정은의 목소리에 담긴 간절함을 읽어냈을 뿐이다. 잠시 후, 그녀의 통장에는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수백만 원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이정은의 무명 생활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약속한 시기에 돈을 갚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1년이 가고, 10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신하균은 단 한 번도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는 방관이 아니라 ‘지독한 배려’였다.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선배의 자존심이 무너질 것을 알았기에 그는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선택했다. 이정은 역시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전대 속 수첩을 확인하며 반드시 성공해 갚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3년 만의 상환, ‘신뢰’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

마침내 2015년,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등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정은은 비로소 모은 돈을 들고 신하균을 찾았다. 4745일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원금을 고스란히 건네며 그녀는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돈을 돌려받는 순간에도 신하균은 특유의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다. 훗날 그는 인터뷰에서 “정은 누나에게 제가 심적으로 받은 것이 훨씬 컸다. 그리고 그때 제가 마침 여유가 좀 있었다”며 오히려 공을 돌렸다.

이후 이정은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인 대기만성형 배우로 우뚝 섰고, 두 사람은 2022년 드라마 <욘더>에서 재회하며 끈끈한 동료애를 이어가고 있다.


가장 민감한 ‘돈’으로 시작된 인연이 ‘사람’이라는 가장 귀한 열매를 맺은 이 일화는, 진정한 신뢰란 말보다 무거운 기다림 속에 있음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