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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에 숨겨진 비밀


남태평양의 외딴섬, 칠레에서 약 3700km 떨어진 ‘라파 누이(Rapa Nui, 이스터섬)’. 이곳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수평선을 응시하며 묵묵히 서 있는 수백 개의 거대 석상, ‘모아이(Moai)’다.

짧게는 3m에서 길게는 20m, 무게는 최대 90톤에 달하는 이 무거운 돌덩이들이 어떻게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않는 황량한 섬 곳곳에 배치될 수 있었을까. 수 세기 동안 수많은 학자가 이 섬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언제나 미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고립된 섬의 거대한 침묵, 누가 이들을 세웠는가

1722년 부활절 아침, 네덜란드의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이 이 섬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고립된 섬에, 현대의 기계로도 옮기기 힘든 거대 석상 887개가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당시 섬에 살던 원주민들의 상태였다. 그들은 석상을 세울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도구는커녕, 제대로 된 배조차 없었으며 심각한 기아와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사 결과, 모아이 석상은 섬 중앙의 화산 바위산인 ‘라노 라라쿠’에서 채굴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미스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채굴장에서 해안가까지는 수십 킬로미터의 험난한 지형이 이어진다.

바퀴도, 가축도 없던 고대 원주민들이 수십 톤의 바위를 어떻게 옮겼느냐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외계인이 고도의 중력 제어 기술을 이용해 옮겼다는 ‘외계인 건조설’을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인 ‘마나(Mana)’를 이용해 석상이 스스로 걸어갔다는 원주민의 전설에 주목했다.


“석상이 걸어갔다”… 전설과 과학의 기묘한 접점

오랫동안 학계는 ‘통나무 굴림대 모델’을 정설로 믿어왔다. 수많은 나무를 베어 바닥에 깔고 석상을 눕혀 밀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섬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릴 만큼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소모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라파 누이는 한때 울창한 숲이었으나, 모아이 제작 시기와 맞물려 숲이 완전히 사라진 ‘생태적 재앙’을 맞이했다.

그러던 중, 2011년 고고학자 테리 헌트와 칼 리포는 충격적인 실험 결과를 발표한다. 그들은 석상을 눕히지 않고, 세운 상태에서 세 방향으로 밧줄을 걸어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이 모습은 마치 거인이 뒤뚱거리며 걷는 듯한 형상이었는데, 이는 “석상이 스스로 걸어갔다”는 원주민들의 고대 전설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과학이 전설의 손을 들어준 순간이었다.

영광의 대가인가, 저주의 산물인가

그러나 석상을 옮기는 법을 알아냈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풀린 것은 아니다. 원주민들은 왜 자신들의 생존 기반인 숲을 파괴하면서까지 이 거대한 석상에 집착했을까.

고고학자들은 모아이가 조상의 영혼을 기리고 부족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이었다고 분석한다. 석상이 커질수록 부족의 권위는 높아졌고, 그 경쟁은 광기로 변질되었다. 결국, 마지막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지자 섬의 생태계는 붕괴했다. 카누를 만들 수 없어 고기잡이가 불가능해졌고, 토양 침식으로 농사마저 실패했다.

굶주림에 지친 부족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숭배했던 모아이의 눈을 파내고 쓰러뜨리는 ‘모아이 전복 전쟁’이 발발했다. 화산 채굴장에는 만들다 만 수많은 석상이 버려진 채 남겨졌고, 한때 찬란했던 문명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


모아이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불러온 비극적인 기념비다. 오늘날에도 라파 누이의 해안가에 서 있는 모아이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다만, 그 기괴하고 거대한 형상으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자원을 소진하며 쌓아 올린 영광은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모아이 석상이 이스터 섬의 거대한 외형적 골격이라면, 그 위에 얹힌 붉은 모자 ‘푸카오(Pukao)’와 해독되지 않은 문자 ‘롱고롱고(Rongorongo)’는 이 문명의 지적 정점과 파멸의 예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기괴한 유산이다.
1864년, 섬을 방문한 선교사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난 롱고롱고 문자는 고고학계의 거대한 통곡의 벽이다. 이 문자는 인류가 발명한 문자 시스템 중 가장 독특하고 미스터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외부 세계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섬에서 인류가 독자적으로 문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언어학적으로 경이에 가깝다. 목판에는 사람, 새, 물고기, 식물 등 800여 개의 정교한 기호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고도의 체계를 갖춘 문자열로 분석된다.
롱고롱고는 한 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은 뒤, 나무판을 180도 뒤집어서 다음 줄을 읽어야 하는 ‘역우경식’이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 듯 이어지는 이 방식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자행된 노예 사냥과 전염병으로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지식인 계급이 전멸하면서, 이 목판에 담긴 기록은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그것이 찬란한 역사였는지, 혹은 파멸을 앞둔 비명이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부 모아이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붉은 원통형 돌이 얹혀 있다. 이것이 바로 ‘푸카오’다. 본체인 모아이와는 전혀 다른 재질의 이 돌은, 섬의 또 다른 화산인 ‘푸나 파우’에서 채굴된 붉은 화산재 암석이다.
푸카오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붉은색은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 신성한 힘인 ‘마나(Mana)’를 상징한다. 원주민들은 석상의 머리 위에 10톤이 넘는 붉은 돌을 올림으로써, 조상의 영혼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었다.
10m가 넘는 거구의 머리 위로 이 무거운 돌을 올리기 위해 그들은 수백 미터의 경사로를 만들고 밧줄로 굴려 올리는 초인적인 노동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 붉은 왕관은 문명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석상의 크기가 커지고 푸카오가 더 거대해질수록, 섬의 자원은 바닥을 드러냈다.
더 크고 화려한 푸카오를 올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나무들까지 지렛대와 굴림대로 사용되면서 섬의 생태계는 회복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한 힘을 얻기 위해 올린 붉은 돌은 부족 간의 전쟁과 기아를 불러오는 저주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현재 이스터 섬에는 해독되지 않은 26개의 롱고롱고 목판과, 머리에서 떨어진 채 나뒹구는 붉은 푸카오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적 성취의 산물이었던 문자와 종교적 열망의 끝이었던 푸카오는, 한 문명이 어떻게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소멸해갔는지를 증명하는 서늘한 유물로 남았다.


모아이 석상이 쓰러지고 숲이 사라진 라파 누이(이스터 섬)의 황폐한 대지 위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원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마지막 종교적 분출구는 바로 ‘오롱고(Orongo)’ 절벽에서 펼쳐진 기괴한 서바이벌 게임, ‘탕가타 마누(Tangata Manu)’ 즉, 조인(鳥人) 선발 대회였다.
17세기경, 섬의 자원이 고갈되자 조상 숭배의 상징이었던 모아이 체제는 붕괴했다. 부족 간의 처참한 내전 끝에 승리한 세력은 더 이상 돌덩이에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은 매년 봄, 하늘을 날아 섬을 찾아오는 검은등제비갈매기(Manutara)를 새로운 신의 전령으로 삼았다.
이 시기부터 섬의 권력 구조는 세습제가 아닌, 오로지 ‘체력과 운’으로 결정되는 철저한 능력 위주로 재편되었다. 각 부족의 추장들은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걸고 싸울 전사인 ‘호푸(Hopu)’들을 선발하여 험난한 경기에 투입했다.
경기의 규칙은 단순하지만 잔혹했다. 해발 300m가 넘는 깎아지른 듯한 오롱고 절벽을 맨몸으로 내려가, 상어가 출몰하는 거친 바다를 2km나 헤엄쳐 건너야 했다. 목적지는 작은 바위섬인 ‘모투 누이(Motu Nui)’였다.
전사들은 바위섬의 동굴에 숨어 제비갈매기가 첫 번째 알을 낳을 때까지 며칠, 길게는 몇 주를 버텨야 했다.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것은 기본이었다.

마침내 첫 번째 알을 손에 넣은 전사는 그것을 이마에 두른 머리띠에 고정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바위에 부딪혀 죽거나 상어에게 습격당하는 전사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경쟁자의 알을 깨뜨리기 위해 수중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장 먼저 온전한 알을 가지고 복귀해 추장에게 바친 전사는 그해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를 보낸 부족의 추장은 ‘탕가타 마누'(조인)라는 칭호를 얻으며, 향후 1년 동안 섬 전체의 자원 배분권을 장악하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 축제는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조인이 된 추장의 부족은 다른 부족의 자원을 합법적으로 약탈했고, 이는 또 다른 복수와 원한의 씨앗이 되었다. 신성한 의식이라는 허울 아래, 섬의 마지막 남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1860년대 기독교가 전파되며 이 잔혹한 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오롱고 절벽 곳곳에 새겨진 ‘새 머리를 한 인간’의 암각화는 당시의 광기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모아이라는 거대 석상을 세우던 열망이 꺾인 자리에는, 알 하나에 목숨을 걸고 절벽을 오르내리던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남았다. 조인 선발 대회는 극한의 환경에 내몰린 인류가 어떻게 종교와 결합하여 기괴한 생존 방식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슬픈 기록 중 하나다.

모아이 석상과 조인 선발 대회로 이어지던 라파 누이(이스터 섬)의 독자적인 역사는 18세기,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난 거대한 돛단배들과 함께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1722년 4월 5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이 이 섬을 발견했을 때는 마침 부활절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지에 “이 황량한 섬에 서 있는 거대한 석상들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경이로움은 곧 비극으로 변했다.
호기심에 가득 차 배로 다가오던 원주민들을 향해 네덜란드 선원들이 위협 사격을 가하면서 십여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서구 문명과 라파 누이가 맺은 첫 번째 인연이었다. 이후 영국, 스페인,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잇따라 섬을 찾았고, 그때마다 섬의 자원과 인력은 이방인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며 비극은 극에 달했다. 1862년, 페루의 노예 상인들이 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속임수와 폭력을 동원해 섬 인구의 상당수였던 1500여 명의 원주민을 강제로 끌고 갔다.
끌려간 이들 중에는 섬의 왕과 제사장, 그리고 유일하게 ‘롱고롱고’ 문자를 읽을 줄 알던 지식인 계층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으로 생존자 15명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자유가 아니라 ‘천연두’라는 치명적인 선물이었다. 면역력이 없던 섬 주민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한때 수만 명에 달했던 인구는 1877년경 단 111명까지 급감했다.

인구가 궤멸 직전에 이르자, 섬은 더 이상 인간의 땅이 아니었다. 1888년 칠레 정부가 섬을 합병한 뒤, 라파 누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양 사육 회사에 장기 임대되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은 섬의 한구석인 ‘항가 로아’ 마을에 울타리를 치고 갇혀 지내야 했다. 조상의 영혼이 깃든 모아이 석상 곁에는 양 떼가 방목되었고, 원주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이동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찬란한 문명이 단 몇십 년 만에 양 사육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이스터 섬은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다시 활기를 띠고 있지만, 해안가에 서 있는 모아이들의 등 뒤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외부 세계와의 조우는 라파 누이에게 새로운 문명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간직했던 고유의 언어와 신념, 그리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종말’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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