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꿈에 나타난 형수 ‘현덕왕후’의 저주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 강원도 영월의 험준한 산세 아래, 열일곱 소년이었던 단종(端宗)이 승하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길에 오른 지 불과 4개월 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비극은 끝이 아니라, 승리자인 세조의 침전에서 시작될 또 다른 공포의 서막이었다.
엇갈린 죽음의 전조, “네 아들을 대려가겠다”
세조가 단종을 처형하기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457년 9월 2일, 세조가 그토록 아꼈던 장남 의경세자(당시 20세)가 갑작스러운 발작 끝에 숨을 거두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세조에게 이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았다.
야사에 따르면, 의경세자가 죽기 직전 세조의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피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세종의 맏며느리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였다. 그녀는 세조를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내 아들의 자리를 빼앗고 죽이려 하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

잠에서 깬 세조는 혼비백산했으나, 이미 세자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아들의 죽음이 형수의 저주 때문이라 믿기 시작한 세조의 불안은 광기로 변했고, 이는 결국 한 달 뒤 유배지에 있던 단종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릉(昭陵)의 수난, 멈추지 않은 저주
세조는 슬픔을 달래는 대신 복수를 택했다. 1457년, 세조는 이미 고인이 된 현덕왕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그녀가 잠든 경기도 안산 소재 소릉(昭陵, 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인근)을 파헤치라는 명을 내렸다. 또 종묘에서 신주를 내치고 무덤을 파헤쳐 평토장(봉분없이 평평하게 만듦)했다.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소릉을 파헤칠 당시 기이한 현상이 속출했다. 인부들이 삽을 대려 하자 하늘에서 마른벼락이 치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간신히 파헤친 관은 너무나 무거워 수십 명의 장정이 달라붙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세조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관을 끌어내어 바닷가에 버리려 했으나, 관은 물 위에 둥둥 떠서 가라앉지 않고 육지로 자꾸만 밀려왔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녀의 유해는 물가 모래바닥에 대충 묻히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다.
형수의 무덤까지 파헤쳤지만 세조의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세조의 온몸에는 정체 모를 종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고름이 터지고 살이 썩어가는 지독한 피부병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몸을 좀먹는 종기가 현덕왕후가 꿈속에서 내뱉은 ‘분노의 침’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평생을 죄책감과 공포 속에 살았다.
세조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전국의 사찰을 돌며 기도를 올렸다.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등을 씻었다는 설화가 전해질 만큼 간절했으나, 피부병은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혔다.
실제로 상원사 문수동자상 내부에서는 세조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피고름이 선명하게 묻은 명주 저고리가 발견되어, 당시 세조가 겪었던 육체적 고통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저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의경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된 차남 예종 역시 즉위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세조의 직계 혈통들이 줄줄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며 백성들은 “단종 어머니의 복수”라며 수군거렸다.

56년 만의 복권, 씻기지 않는 역사의 얼룩
현덕왕후의 원혼과 소릉의 수난은 조선 왕실의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녀의 신위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소릉이 복구된 것은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1513년(중종 8년)의 일이다.
중종 시대의 사림파들은 “어머니가 아들(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천륜인데, 이를 죄로 물어 무덤을 파헤친 것은 천리에 어긋난다”며 끈질기게 복권을 건의했다.
결국 현덕왕후는 왕후의 지위를 되찾았고, 그녀의 관은 남편 문종이 잠든 현릉(顯陵) 곁으로 옮겨졌다. 죽어서도 쫓겨났던 아내와 남편이 반세기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역사는 기록한다. 칼로 잡은 권력은 화려했을지언정,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혈육의 목숨과 평생의 육체적 고통은 세조가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업보였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와 그 대가를 치른 왕의 이야기는,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권력의 허망함’을 경고하는 서늘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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