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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충절


1457년(세조 3년) 10월 24일. 강원도 영월의 동강(東江) 물줄기는 서늘한 초겨울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며칠 전 사약을 받고 승하한 어린 임금, 단종(端종)의 시신은 거두어주는 이 없이 차가운 강물에 던져졌다.

세조의 서슬 퍼런 감시 아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서슬 퍼런 금령(禁令)이 영월 땅을 얼어붙게 했던 그때, 한 남자가 어둠을 뚫고 강가로 향했다. 그는 권력의 서슬보다 인간의 도리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영월의 호장(아전) 엄흥도(嚴興道)였다.

죽음의 강가, 버려진 임금을 마주하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영월 관아의 아전이었던 엄흥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슬픔에 젖어 시 한 수를 남기고 떠난 자리에는 공포만이 가득했다. 시신은 강변에 방치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창틈으로만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엄흥도는 결심했다. “충(忠)을 위해 죽는 것은 도리이지, 화가 아니며, 옳은 일을 하다가 해를 입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아들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그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장성한 아들들을 거느린 노련한 하급 관리였음을 감안하면 50~6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는 미리 준비한 관을 수레에 싣고 차가운 강물이 몰아치는 소나루(昭羅) 근처로 향했다.

엄흥도는 강물에서 단종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이미 사흘이 지나 시신은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고귀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을 감싸고 정성스레 관에 모셨다.


어명이 서슬 퍼런 상황에서 관을 옮기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엄흥도는 눈보라가 치는 산길을 택했다. 고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험준한 산등성이를 오르던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추격해올 관군의 발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밤새도록 시신을 등에 업고 산속을 헤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장지를 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엄흥도의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겨울 눈 덮인 산중에 유독 눈이 녹아 있고 따스한 기운이 도는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는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엄흥도를 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엄흥도는 그곳이 하늘이 정해준 명당(지금의 노루목, 노루가 쉬던 자리)임을 직감했다.

그는 아들들과 함께 그 자리에 급히 구덩이를 파고 단종을 안장했다. 봉분을 크게 만들면 금방 들통날 것을 우려해 평토장(봉분 없이 평평하게 묻음)을 하거나 아주 작게 흙을 돋웠다. 장례를 마친 엄흥도는 그 길로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세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엄흥도의 이 같은 초인적인 충절은 오랫동안 쉬쉬하며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왔다.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후대 왕들이 단종의 억울함을 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잊혔던 충절, 241년 만에 빛을 발하다

1698년(숙종 24년), 숙종은 그동안 ‘노산군’으로 불리던 단종을 다시 ‘단종’이라는 왕호로 복위시켰다. 단종이 왕으로 복위됨에 따라 엄흥도가 몰래 묻었던 자리를 정식 왕릉으로 격상하고 ‘장릉'(莊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엄흥도의 충절이 공식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숙종은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어 1741년(영조 17년), 영조는 엄흥도의 충심을 매우 높게 평가하여 그를 공조판서에 추증함으로써 충신의 반열에 올렸다.
영조가 아전(호장) 신분이었던 엄흥도에게 장관급인 ‘판서’ 직위를 내린 것은 그의 행동을 단순한 충성을 넘어 ‘나라의 근간을 지킨 행위’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영조는 영월 장릉 옆에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비와 정려각을 세우도록 명했다. 이는 왕의 무덤 곁에 아전(하급 관리)의 기림 시설이 들어선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조치였다.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도성 밖 먼 강원도 땅에 위치한 배경에는 이처럼 엄흥도라는 이름 없는 아전의 목숨 건 사투가 있었던 것이다. “충신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그 이름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는 말처럼, 엄흥도의 결단은 피의 군주였던 세조조차 막지 못한 인간 존엄의 승리였다.


엄흥도의 행적은 오늘날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다. 영월 장릉 곁에는 엄흥도의 정려각이 세워졌고, 그를 기리는 ‘충절사'(忠節祠)가 영월에 남아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인 없는 시신을 거두었던 그날의 시린 눈보라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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