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가장 슬픈 로맨스 ‘단종과 정순왕후’
1457년(세조 3년) 음력 6월 21일. 창덕궁을 나선 압송 행렬이 도성 밖 동쪽 길로 향하고 있었다. 행렬의 중심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 조선의 왕이었으나, 이제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당시 17세)이 서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청계천 끝자락의 어느 돌다리. 그곳에는 남편의 유배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온 정순왕후 송씨(당시 18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64년 생이별을 알리는 잔혹한 서막이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영영 건너간 다리”의 통곡
숙부 세조의 칼날 아래 왕위에서 밀려나고, 이제는 죽음보다 깊은 유배지로 떠나야 하는 어린 왕의 앞길은 처량했다. 정순왕후는 유배지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렬을 쫓았다. 당시 청계천 하류에 놓인 옥천교(玉川橋, 현 영도교) 위에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
군사들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 두 사람은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 2년)에 혼인했다. 당시 단종은 14세(만 13세), 정순왕후는 15세(만 14세)였다. 어린 나이에 혼인하여 3년 남짓한 세월 동안 풍파를 함께 겪어낸 부부였다.
정순왕후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남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으나, 호송 관원들은 무정하게 단종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그 다리는 훗날 백성들에 의해 ‘영도교(永渡橋)’라 불리게 된다. ‘영영 건너간 다리’, 혹은 ‘영원히 이별한 다리’라는 뜻이다.
단종이 다리를 건너 영월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정순왕후는 다리 난간에 기대어 통곡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청계천 물살에 섞여 흘러갔고, 단종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산굽이 너머로 사라졌다.
단종이 떠난 후, 정순왕후는 의덕왕비에서 ‘군부인'(郡夫人)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동대문 밖 낙산 기슭에 있던 여승들이 수행하던 정업원(淨業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머리를 깎지는 않았으나 평생 소복을 입고 단종의 명복을 빌며 절개를 지켰다.
야사에 따르면 세조가 정순왕후의 끼니를 걱정해 곡식을 보냈으나, 그녀는 “내 남편을 죽인 자가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염색 일과 동네 여인들이 나누어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려고 물을 뜨던 샘물(자주동샘)은 그녀의 슬픈 마음을 알아준 듯 늘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과 저녁, 정업원 뒷산 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유배 간 동쪽(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마을 사람들은 왕후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함께 가슴을 쳤다. 후대 백성들은 이 봉우리를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의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렀다.
1457년 10월, 단종의 부고가 전해진 날 정순왕후의 절규는 온 산을 울렸으나 그녀는 죽지 못했다. 남편의 넋이라도 기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 ‘엇갈린 영원’
정순왕후는 중종 16년(1521년)에 82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무려 64년이 흐른 뒤였다. 그녀는 유언으로 “죽어서라도 남편의 곁에 가고 싶다”고 했으나, 왕실의 명분 때문에 결국 단종이 잠든 영월 장릉이 아닌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홀로 묻혔다.

사릉(思陵)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생 단종을 사모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죽어서도 수백 리 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야 했던 두 사람의 서사는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애절한 로맨스이자 비극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서울 청계천의 영도교 위에는 두 사람의 이별을 기리는 표석이 서 있다. 수많은 차와 사람이 오가는 번화한 도심이 되었지만, 그 다리 아래 흐르는 물줄기는 500여 년 전 어린 부부가 나누었던 마지막 통곡의 소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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