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종친부터 노비까지 ‘어우동의 위험한 연애’
1480년(성종 11년) 10월 18일, 차가운 가을바람이 몰아치던 날, 조선 팔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한 여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녀의 이름은 어우동(於乙宇同, 당시 30세 추정).
왕실의 종친이었던 남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욕망의 화신’이 되어 조선의 근간인 유교적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그녀의 삶은 죽음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우동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다.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명문가에서 자란 그녀는 왕실 종친인 태강수(泰江守) 이동과 혼인했다. 그러나 남편 이동은 은장(銀匠)의 아내와 눈이 맞아 어우동을 모함하며 억지로 내쫓았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쫓겨난 여인에게 허락된 삶은 죽음과도 같은 은둔뿐이었다. 그러나 어우동은 달랐다. 그녀는 정절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스스로의 욕망을 해방시키기로 결심한다.
빼어난 미색과 시와 서예에도 능했던 어우동은 자신의 집을 화려하게 꾸몄다. 밤에는 스스로 기생의 옷을 입은 채 거리로 나서며 조선의 밤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내 어찌 한 사내에게 매여 평생을 눈물로 지새우겠는가”라는 그녀의 대담한 행보는 곧 도성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의 서막이었다.
신분과 귀천을 허문 ‘연애 리스트’
어우동의 행보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그녀의 침소에는 신분과 귀천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성종실록 120권)에 기록된 그녀의 남성 편력은 당대 최고 권력층부터 최하층 노비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어우동은 남편의 친척인 방산수(方山守) 이난, 수산수(守山守) 이기 등 왕실 종친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어우동의 미모와 지적인 매력에 사로잡혀 체통을 버리고 밤마다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중 이난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로, 어우동에 빠진 나머지 그녀의 팔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게 할 정도로 소유욕이 강했다.
이기는 어우동 남편 태강수의 친척 동생으로 시동생 뻘이었다. 그도 형수인 어우동에 푹 빠져 온갖 진귀한 비단과 패물을 갖다 바쳤고, 심지어 집을 나와 어우동 집 근처에 방을 얻어 살기까지 했다.

승정원 우승지 어유소, 과거 급제자 노공필, 김세적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엘리트 관료들도 줄줄이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정2품 자헌대부 벼슬을 하던 어유소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밤마다 담을 넘어 어우동의 집으로 잠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낮에는 도덕을 논하던 이들도 밤에는 관복을 벗어 던지고 담을 넘어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가 집 수리를 하던 노비, 길거리에서 만난 장사꾼들과도 스스럼없이 정을 통했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사내란 신분이 아닌, 오직 욕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우동은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직접 사람을 보내 마음에 드는 사내를 불러들였고, 거문고를 켜며 시를 읊어 그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러한 행보는 가부장적 질서가 정착되던 조선 사회에 대한 가장 발칙한 선전포고였다.
법전에도 없는 죄명, 그리고 비겁한 사내들
어우동의 엽색 행각이 도성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480년 7월, 조선 최고의 감찰 기관인 사헌부(司憲府)에 제보 하나가 접수된다. 익명의 제보자는 “왕실 종친의 전 아내인 어우동이라는 여인이 사내들을 끌어들여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성종은 즉시 사헌부에 ‘비밀 수사팀’을 꾸려 이 사건을 철저히 파헤치라고 명한다.
수사는 은밀히 진행된다. 사헌부의 하급 관리들이 상인이나 행인으로 변장하여 어우동의 집 근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감시 도중, 밤마다 담을 넘는 사내들의 관복과 신발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왕실 종친이나 고위 관료만이 신을 수 있는 가죽신들이 어우동의 집 대문 앞에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한 수사팀은 사건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직감했다.

확신을 얻은 사헌부 수사관들이 어우동의 집을 기습했다. 현장에서는 어우동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던 종친 방산수 이난이 현장에서 적발되었다. 왕실 종친이 간통 현장에서 잡힌 것은 건국 이래 유례없는 대사건이었다.
어우동은 사헌부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심문)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던 그녀였지만, 수사관들의 집요한 추궁과 증거 제시 앞에 결국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우동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가히 ‘조정 인사 명부’라 할 만했다. 그녀는 자신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이 언제 왔는지,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까지 상세히 진술했다.
수사 과정에서 가장 경악스러웠던 점은 그녀의 몸이었다. 어우동은 자신과 깊은 정을 나눈 남성들의 이름을 자신의 팔이나 등에도 문신으로 새겨두었는데, 수사관들이 이를 확인하면서 빼도 박도 못하는 물증이 확보되었다. 이는 현대의 ‘디지털 포렌식’만큼이나 강력한 증거다.
수사팀은 어우동이 지목한 남성들을 차례로 불러 대조 심문을 벌였다. 하지만 여기서 권력층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다. 승지 어유소와 같은 고위직들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다”, “음해다”라며 관계를 강력히 부인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노비나 장사꾼들은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사실을 자백한다. 수사팀은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고위직들의 알리바이를 하나씩 깨부수며 수사망을 좁혀갔다.
수사의 종결, 성종의 결단과 정치적 타협
수사 결과 보고를 받은 성종은 고민에 빠졌다. 연루된 인물이 너무 많아 모두 처벌했다간 조정이 마비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사는 ‘꼬리 자르기’ 식으로 흘러갔다. 성종은 왕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주동자인 어우동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로 결론지었다.
스캔들이 폭로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사헌부는 “인륜을 저버린 요녀를 죽여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반론도 있었다. 당시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간통죄로 사형을 내리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종은 단호했다. 그는 “어우동의 죄는 법을 넘어선 것이니, 예외적인 처벌이 필요하다”며 ‘강상죄'(綱常罪, 유교 윤리를 어긴 죄)를 적용해, 그녀에게 교형(교수형)을 명했다.

어우동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녀와 몸을 섞었던 수많은 남성 중 책임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위 관료들은 “유혹에 빠졌을 뿐”이라며 발뺌했고, 왕실 종친들은 가벼운 유배 후 금방 복권되었다. 오직 여인인 어우동만이 모든 죄를 짊어진 채 목숨을 잃었다.
어우동 사건 이후 조선은 더욱 엄격한 유교 사회로 변모했다. 성종은 이 사건을 본보기 삼아 ‘재가금지법’을 강화했고,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교육 지침서인 <내훈>을 널리 보급했다. 여성이 정절을 위협받을 때 자결을 택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도 이시기 즈음 부터다.
실록에는 그녀의 이름이 ‘어을우동'(於乙宇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게 본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흔했던 이름 표기 방식(이두식 성명)일 가능성이 크다. 야사나 후대에서는 ‘모두와 어울려 함께하다’는 뜻의 ‘어우동’ 불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 어우동은 남편의 배신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던, 시대보다 너무 앞서 나간 비운의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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