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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사육신묘 ‘7번째 무덤’에 숨겨진 비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정적에 잠긴 묘역이 있다. 우리는 이곳을 ‘사육신묘(死六臣墓)’라 부른다. 1456년(세조 2년), 어린 임금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섯 충신을 기리는 성지다.

그런데 묘역을 거닐다 보면 기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육신'(6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에 안치된 묘비는 총 7개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이름들 곁에 ‘김문기(金文起)’라는 이름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다.

500년 넘게 ‘여섯 명’으로 굳어진 역사적 정설 뒤에 숨겨진 이 일곱 번째 인물의 등장은 단순한 착오일까, 아니면 뒤늦게 바로잡힌 역사의 정의일까.

피의 제단과 지워진 이름들

사건의 시작은 1456년(세조 2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삼문(당시 39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동조자였던 김질의 배신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거열형(車裂刑)이라는 잔혹한 처벌 속에 이들의 시신은 한강 변 모래내(사육신묘 인근)에 버려졌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이는 생육신의 한 명인 김시습(당시 22세)으로 전해진다. 그는 밤을 틈타 시신을 몰래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가매장했다.

사육신의 명단이 확정된 결정적 계기는 남효온(1454~1492)이 쓴 <추강냉화>(秋江冷話) 내 ‘육신전’이었다. 이 문헌이 민간에 널리 퍼지며 6인의 이름이 고착화되었다. 이때부터 민간에서는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추앙하기 시작했다. 조선 영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충절이 공인되었고, 이곳은 공식적인 사육신 묘역으로 정비된다.

하지만 정사(正史)인 <세조실록> 2년 6월 8일 자 기록을 살펴보면 사태는 묘해진다. 실록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공조판서였던 김문기(당시 58세)가 주모자로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선명하다.

김문기는 당시 군 동원권을 가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서 실질적인 무력을 책임졌던 인물이었다. 정사에서는 그를 핵심 가담자로 분류하고 있었으나, 야사인 <육신전>에서 그의 이름이 빠지면서 500년간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다.


이 ‘지워진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77년 7월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세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김문기를 사육신의 반열에 포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문중의 탄원과 학계의 재검토 결과, 김문기는 거사의 핵심 인물임이 분명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기존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를 추가로 설치했다. 공간적 제약과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해 이름은 여전히 ‘사육신묘’로 유지하되, 내부에 모셔진 위패와 묘석은 7개가 되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박제된 역사를 넘어선 오늘의 가치

사육신묘에 숨겨진 ‘7번째 묘’의 비밀은 우리에게 역사가 결코 멈춰있는 박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누군가는 문학적 감수성(남효온의 육신전)으로 역사를 기억했고, 누군가는 차가운 기록(조선왕조실록) 속에 그 진실을 묻어두었다.

오늘날 노량진 사육신 공원을 찾는 이들은 7개의 무덤 앞에서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숫자가 6이든 7이든 중요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1456년 그 뜨거웠던 여름,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나의 임금은 오직 하나”라고 외쳤던 선비들의 서릿발 같은 기개다.


570년 전 한강 변 모래사장에 뿌려진 피는 이제 소나무의 푸름으로 피어났다. 일곱 번째 묘석 김문기의 등장은, 어쩌면 우리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역사의 행간을 채우라는 과거로부터의 전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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