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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정치 게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7년 전쟁


1701년(숙종 27년) 9월, 한양 취선당.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괴한 주문과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한때 일국의 국모였던 희빈 장씨가 인형에 화살을 꽂으며 울부짖고 있었고, 불과 얼마 전 숨을 거둔 인현왕후의 처소 통명전 너머로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300년 전 조선 궁궐을 뒤흔든 이 사건은 단순한 치정극을 넘어, 왕권을 강화하려던 숙종의 냉철한 계산과 세 여인의 욕망이 충돌한 잔혹한 정치 드라마였다.

사건의 발단은 16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1세의 젊은 왕 숙종(이순)은 정비 인경왕후와 사별하고,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받던 14세의 인현왕후 민씨를 계비로 맞이했다. 하지만 숙종의 마음은 명문가 출신의 중전이 아닌, 역관 집안 출신의 미천한 궁녀 장옥정(당시 22세)에게 향했다.

장옥정의 비상과 서인의 몰락

장옥정은 빼어난 미색과 영민함으로 숙종을 매료시켰다. 1688년, 그녀가 아들 윤(훗날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다(기사환국, 1689년).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것에 반대하던 서인들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강등한 것이다. 23세의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안국동 사가로 쫓겨났다. 비록 숙종이 가마꾼을 붙여주어 최소한의 체면은 살려주었으나, 일국의 국모에서 하루아침에 죄인이 된 그녀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이때부터 장옥정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궁녀 출신 왕비’가 되어 남인(南人) 세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녀의 오빠 장희재는 총융사 등 요직을 거치며 군권까지 넘봤고, 남인들은 서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희빈을 이용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인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수리 최씨와 숙종의 운명적 만남

장희빈과 남인 세력이 승승장구하던 1693년(숙종 19년) 어느 깊은 밤, 숙종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궁궐 산책에 나섰다. 장희빈의 기세에 눌려 조정이 숨죽이고 있던 그때, 외진 전각에서 가냘픈 흐느낌과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소리를 따라간 숙종의 눈앞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연회도, 값비싼 음식도 없는 초라한 방 안에서 한 무수리가 정갈하게 차려진 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궁중의 청소나 세숫물 떠다드리기 등 허드렛일을 맡았던 여자 종인 무수리 최씨(당시 24세)였다(최씨의 실명에 대해 야사나 민간 전승에서 ‘최복순’이나 ‘최동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지만, 공식 기록인 실록이나 묘비명에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숙종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혼비백산한 최씨는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가 차린 상 위에는 소박한 음식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숙종이 엄하게 물었다. “이 깊은 밤에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냐?”

당시 장희빈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쫓겨난 인현왕후를 기리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최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인은 예전에 중전마마(인현왕후)를 모시던 무수리이옵니다. 오늘이 마침 마마의 생신이라, 궐 밖에서 고생하시는 마마의 장수와 복위를 기원하며 작은 정성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수문록> 및 야사 재구성.

온갖 권력 투쟁이 난무하는 궁궐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옛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건 이 여인의 ‘충성심’은 장희빈의 표독함에 지쳐가던 숙종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위안이었다. 이날 밤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고 숙원(淑媛)에 봉해진다.

장희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격렬하게 반응했지만, 숙종의 비호 아래 최씨는 승승장구했다. 다음해인 1694년(숙종 20년), 최씨는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을 낳고, 숙의(淑儀, 종2품)로 격상된다. 최씨는 인현왕후의 억울함과 장희빈의 악행을 숙종의 귀에 속삭였고, 남인 세력과 장희빈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룻밤 사이에 뒤집힌 궁궐의 주인

숙종은 영리했다. 그는 장희빈과 남인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숙빈 최씨를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다. 1694년 4월, 남인들이 폐비 복위를 꾀하던 서인들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 하자,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이 무고를 했다며 조정을 하룻밤 사이에 뒤집어엎었다. 서인들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던 것을 역이용해 남인들을 쳐낸 숙종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장씨(장희빈)는 오만방자하고 그 친족들은 권력을 남용했다. 이제 인현왕후를 다시 맞이하고 장씨를 강등하노라.” <숙종실록>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5년간 폐비로 떠돌던 인현왕후(당시 28세)가 화려하게 복위했다.
반면, 중전으로 위세를 떨치던 장희빈(당시 35세)은 그날로 왕비의 인장(국새)을 빼앗겼고, ‘희빈’으로 강등되어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의 후미진 별당인 취선당(取善堂)으로 쫓겨났다.

실록과 야사에 따르면, 장희빈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숙종에게 매달려 울부짖었으나, 숙종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제의 부하들이 오늘의 적이 되어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압송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궁 밖으로 쫓겨났다. 장희빈은 오직 ‘세자의 어머니’라는 가느다란 끈 하나에 의지해 목숨만 부지하게 된 것이다.

인형에 꽂힌 화살과 장희빈의 최후

궁궐의 주인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 기막힌 교체에는 두 여인 사이의 살의(殺意)가 서렸다. 인현왕후에게는 5년 유배의 한(恨)이, 장희빈에게는 빼앗긴 왕비자리에 대한 독기(毒氣)였다.

장희빈은 비록 강등되었으나 세자(훗날 경종)의 생모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인현왕후를 향해 문안 인사를 올릴 때도 “내가 본래 이 자리의 주인이었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처소를 찾을 때면 취선당에서 곡소리를 내거나 세자를 앞세워 숙종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등 심리전을 펼쳤다.

인현왕후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유교적 덕목인 ‘인내’를 방패 삼아 장희빈의 표독함을 숙종에게 부각시켰다. 이때 인현왕후의 강력한 우군으로 등장한 인물이 최씨였다. 그녀는 1695년(숙종 21년), 귀인(貴人, 종1품)으로, 1699년(숙종 25년), 마침내 후궁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정1품 숙빈(淑嬪)의 자리에 오른다.


1700년경부터 인현왕후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종기와 다리 부종)되자, 전쟁은 ‘주술전’으로 치달았다. 장희빈은 취선당에 몰래 신당을 차리고 무당을 불러들였다. 밤마다 인현왕후의 거처인 통명전 방향으로 화살을 쏘고, 인형에 바늘을 꽂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심지어 죽은 동물의 사체나 더러운 오물을 인현왕후의 처소 담장 밑에 파묻는 등 현대판 ‘심리 테러’를 가했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취선당 주변에는 밤마다 타오르는 촛불과 기괴한 주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단암만록>, <숙종실록>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35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자, 서인 세력과 결탁했던 숙빈 최씨는 정교한 타이밍에 숙종에게 고변했다. 취선당 서쪽에서 인형과 흉측한 물건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었고, 숙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장희빈은 “아픈 세자의 쾌차를 빌었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소용없었다.

1701년 10월 10일,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아들인 세자(경종)의 애원도 냉철한 군주 숙종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다.

야사에 따르면 당시 장희빈은 아들(세자)의 이름을 부르며 사약을 거부하고 발악했다고 한다. 결국 사약을 마신 장희빈은 43세의 나이로 피를 토하며 생을 마감한다.
이로써 7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두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숙종은 이후 “다시는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는 법령(임인제명)을 세워 비극의 재발을 막으려 했다.


이 스캔들은 단순히 세 남녀의 치정 싸움이 아니었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숙종이 환국(換局)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로 여인들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버린, 궁궐의 잔혹한 생존 게임이었다. 한 여인은 억울한 병사로, 한 여인은 사약으로, 그리고 살아남은 한 여인(숙빈 최씨)은 아들을 왕(영조)으로 만들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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