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

삼촌 국왕 권총으로 암살한 사우디 왕자



1975년 3월 25일 오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위치한 국왕의 집무실 ‘알 후크무 궁전. 이날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성스러운 날이었다.
당시 사우디의 통치자이자 ‘근대 사우디의 설계자’로 칭송받던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국왕(69)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마즐리스(Majlis, 공개 알현)’를 주재하고 있었다.

왕궁을 피로 물들인 세 발의 총성

전 세계 석유 파동의 중심에 서 있던 강력한 군주 파이살 국왕 앞에 한 젊은 왕자가 다가왔다. 국왕의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31)였다. 국왕은 반가운 표정으로 조카를 맞이하며 이슬람식 인사를 나누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친근한 포옹 대신 돌아온 것은 차가운 총구였다. 정적을 깨는 세 발의 총성이 알현실을 가득 메웠고, 중동의 거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건 직후 왕실은 충격에 휩싸였고, 무사이드 왕자는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초기에 정부는 국왕을 살해한 왕자가 ‘정신 질환자’라고 발표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왕족이 제정신으로 국왕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끼칠 충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어 진행된 정밀 정신 감정 결과는 달랐다. 의료진과 사법 당국은 그가 범행 당시 사물의 변별 능력이 충분했으며,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국왕에게 접근하기 위해 왕실 일원이라는 신분을 철저히 이용했고, 가장 무방비 상태인 인사의 순간을 노렸다.

암살된 압둘라이즈 국왕(왼쪽)과 암살범인 조카 무사이드 왕자(오른쪽 상자).

수사 당국은 사건 직후 그가 왜 숙부이자 최고 권력자인 국왕을 살해했는지에 집중했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배경은 복합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동기로 꼽힌 것은 ‘가족의 복수’였다. 1966년, 사우디에 TV 방송국이 처음 들어설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거센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때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인물이 바로 무사이드 왕자의 친형인 ‘칼리드 왕자’였다.


무사이드 왕자는 형의 죽음이 국왕의 근대화 정책 때문이라고 믿었으며, 오랜 시간 가슴 속에 복수심을 키워온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미국 유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와의 관계나 약물 복용 전력 등 개인적인 일탈이 왕실의 제재를 받으면서 쌓인 불만도 범행의 도화선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미국 유학생에서 국왕 저격범으로

무사이드 왕자는 당시 사우디 왕실 내에서도 다소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와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공부한 엘리트 유학생이었다. 서구 문물을 익히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그는, 귀국 후 보수적인 사우디 왕실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슬람 법정은 그에게 ‘고의적 살인’과 ‘국가 반역죄’를 적용했다. 특히 피해자가 국가의 수장인 국왕이었기에, 일반적인 살인 사건보다 훨씬 무거운 법적 잣대가 적용되었다. 사우디 왕실 내부에서도 “왕실의 위엄과 국가의 기틀을 흔든 자에게는 자비가 있을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1975년 6월18일, 국왕이 서거한 지 약 석 달 만에 처형이 확정되었다. 처형 장소는 리야드의 중심부인 ‘디라 광장’이었다. 이곳은 평소에도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나, 왕자가 사형대로 끌려나온다는 소식에 수만 명의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흰색 죄수복을 입은 무사이드 왕자는 눈이 가려진 채 광장 중앙으로 끌려나왔다. 집행관이 국왕의 이름으로 판결문을 낭독했고, 이내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 수천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자의 목이 떨어졌다. 이는 사우디 역사상 왕족이 국왕 시해 혐의로 공개 처형된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는 AI 생성 이미지.

흥미로운 점은 피해자인 파이살 국왕의 유언이었다. 국왕은 숨을 거두기 직전, 조카인 무사이드 왕자를 살려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우디의 법 체계와 왕실 가문은 국왕 개인의 자비보다 ‘법의 엄중함’을 선택했다. 왕족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죄를 지으면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전제군주제의 냉혹한 원칙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피로 쓴 왕정의 교훈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 사건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깊은 트라우마와 동시에 강력한 통제 기제를 남겼다. 이 사건 이후 사우디 왕실은 왕자들의 해외 유학과 개인 행동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으며, 왕실 내부의 기강을 잡는 계기로 삼았다.

동시에 이 사건은 사우디라는 국가가 ‘혈연’보다 ‘이슬람 율법(샤리아)’과 ‘왕권의 안정’을 우선시한다는 점을 전 세계에 선포한 사건이었다. 국왕을 죽인 조카를 대중 앞에서 처형함으로써, 사우디 왕정은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이 단순한 가족 경영이 아닌 엄격한 법 집행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40여 년 전 리야드 광장에 뿌려진 왕자의 피는, 오늘날까지도 사우디 왕실 일원들에게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자에게 돌아갈 자리는 없다”는 서늘한 경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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