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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명과 바람핀 사대부 여인 ‘유감동 스캔들’


세종 9년(1427년) 8월16일, 한양 사헌부에 한 통의 고발장이 접수된다. 유교적 질서가 공고히 뿌리 내리던 조선 초기의 한복판에서 성리학적 윤리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치정(강상죄 위반) 사건의 막이 오른 것이다.

고발인은 당시 현직 관리였던 최사강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어머니(숙모)인 유감동(兪甘同, 30대)이 수십 명의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으며, 음란한 행실을 일삼고 있으니 엄중하게 수사해 달라고 촉구했다.

평양 길 위의 겁탈과 이상하게 변질된 관계

<세종실록> 37권과 38권에 따르면 당시 유감동은 검한성윤(檢漢城尹)유귀수의 딸로 태어나 평양 현감 최중기와 혼인한, 소위 ‘엘리트 가문’의 여인이었다.

고발장을 접수한 사헌부 관리들은 처음에는 정숙한 여인의 일탈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감동의 거처를 급습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수사관들 앞에 선 유감동은 당황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상대한 남자의 이름을 다 대면 성안에 남아날 관리가 없을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면서 자신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의 이름을 하나둘씩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 명단에는 조정에서 임금과 국정을 논하던 대신들의 이름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감동은 남편 최중기가 평양 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동행했다. 평양으로 향하던 중 그녀가 잠시 행렬에서 떨어져 있을 때 김여달(金如達)에게 겁탈(강간)을 당한다.

김여달은 유감동이 ‘정절을 잃었다’는 것을 약점 잡아 지속적으로 협박하며 관계를 요구한다. 유감동은 이런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워 그의 요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어느 순간 유감동도 김여달을 따라 강화도 등으로 도망가는 등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결국 이 사실이 최중기에게 발각된다. 유교적 정절이 여성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지던 시대, 최중기는 유감동을 냉대와 혐오로 대하며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어 멀리했다.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가자 남편과의 관계가 파탄났다고 판단한 유감동은 병을 핑계 삼아 한양으로 올라온다.

그녀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로 남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어 사대부 사회의 위선을 파고들었다.

사대부의 안방을 무너뜨린 금기된 외출

유감동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담했다. 그녀는 상대의 신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으로 남성들을 끌어들였다.
집안의 가구를 수리하거나 장신구를 만든다는 핑계로 장인들을 안방 깊숙이 불러들였다.

은장도를 만드는 장인에게는 “칼날이 예리하지 않다”며 곁에 머물게 했고, 갓을 만드는 장인에게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밤늦도록 작업을 시켰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는 술을 권하며 이들을 유혹했고, 신분의 벽을 허무는 행위에서 기묘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유감동은 집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때때로 남자의 옷을 입고 갓을 쓴 채 밤거리를 배회했다.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하면 자신의 노비를 시켜 상대의 이름과 거처를 알아내게 했다. 이후 그녀는 상대의 집 대문을 직접 두드리며 “길을 잃은 나그네” 혹은 “친척의 지인”이라 사칭하며 침소까지 파고들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부친 유귀수의 장례 기간 중 벌어진 행각이었다. 유교 사회에서 부모의 상은 모든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신성한 기간이다. 그러나 유감동은 상복을 입은 채 조문을 온 아버지의 동료 관리들을 유혹했다. 곡소리가 들리는 빈소 뒤편에서 벌어진 이 기이한 만남은 당시 수사관들에게 심각한 윤리적 공포를 안겨주었다.

수사가 본격화되자 사헌부에는 유감동이 지목한 관리들이 하나둘 소환되시 시작한다. 사대부들은 마치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저 여자를 본 적도 없다”며 발뺌했다. 예문관 대재학이었던 정초나 공조판서 황자후 같은 거물급 인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같이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대부들이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잡아떼면, 유감동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날 밤 당신이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고 응수하며 수사관들 앞에서 그들을 망신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준 패물, 옷의 색상, 심지어 몸에 난 점의 위치와 은밀한 신체적 특징까지 상세히 진술했다. 증거가 너무나 구체적이었기에, 부인하던 관리들은 수사관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유감동의 수족이었던 노비들도 국문을 피하지 못했다. “누구의 집에 편지를 전달했느냐”는 추궁에 이들은 유감동이 주고받은 서신들의 수신인을 낱낱이 불었다. 사헌부는 이를 바탕으로 유감동의 진술과 대조했고, 명단에 오른 40여 명의 남성이 실제로 그녀와 접촉했음을 확인했다.

곤장 100대 맞고 관청 노비로 전락

이 사건은 당시 국왕이었던 세종에게도 어려운 과제였다.

조정은 연일 유감동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강경론자들은 “강상죄(인륜을 저버린 죄)를 범했으니 마땅히 극형(사형)에 처해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던 신하들은 그녀를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세종대왕은 법치주의와 사회 기강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왕은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한 남성들도 똑같이 엄벌에 처해야 형평성에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만약 유감동을 사형시킨다면, 그녀와 관계를 맺은 수십 명의 고위 관리들 역시 사형시키거나 그에 준하는 처벌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너무 많은 관리들이 연루되어 자칫 국정이 마비될 것을 우려한 정치적인 판단도 포함돼 있었다.

세종 9년 10월, 사건이 공론화된 지 약 두 달 후 마침내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그 결과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정은 유감동을 ‘남자를 유혹해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원흉’으로 지목했다. 그녀에게는 남편을 배반한 죄, 거짓으로 창기라 일컬으며 사욕을 방자하게 행사한 죄, 음란한 행위로 인륜을 문란케 한 죄를 물어 곤장 100대와 사대부에서 관비(관청 노비)로 강등한 후 함경도 변방의 바닷가 근처 고을로 유배시켰다.


이는 목숨만 붙어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명예를 박탈당한 무거운 처벌이었다. 실록은 그녀를 ‘음부'(음란한 계집)로 규정하여 후대에까지 불명예를 남겼다.

반면 연루된 관리들은 궁색한 변명으로 법망을 피해갔다. 당시 법전에 따르면 상대가 양반 부인임을 알고 간통하면 중죄였으나, 창기(기생)으로 오인했다면 처벌 수위가 현저히 낮아졌다.
이를 기준으로 유감동이 사대부가의 여인인 줄 알았다고 진술한 관리는 곤장 80대, 기생으로 오인했다고 진술한 관리는 곤장 60대로 정해졌다. 이들의 직첩은 모두 회수된다.
이때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관리들은 입을 맞춘듯이 “나는 그녀가 양반집 부인인 줄 몰랐고, 그저 기생인 줄로만 알았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데 그친다.

“기생인 줄 알았다”는 비겁한 변명과 화려한 귀환

사건 종결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파직되었던 관리들 상당수는 복직수순을 밟았다. 황희 정승의 아들이자 판강릉 부사였던 황치신은 관찰사가 되었고, 고모부 이효례의 간통녀인 줄 알고도 간통한 권격은 세종과 사돈이 된다. 숙부의 간통녀인 줄 알면서 간통한 공조판서 등을 지낸 정효문은 중추원 부사에 올랐다. 유감동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이 대부분 이런식으로 화려하게 복직된다.

유감동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다. 그것은 정절을 강요하면서도 스스로의 욕망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했던 당대 지배층의 위선에 대한 유감동의 처절하고도 대담한 폭로였다.
유감동은 형틀 위에서도 끝까지 당당했으나, 그녀와 함께 즐겼던 남성들은 어둠 속에서 이름이 불릴까 벌벌 떠는 초라한 확신범들이었다.


유감동 사건이 조선 사회에 남긴 가장 뼈아픈 메시지는 “여성은 정절을 잃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상실하지만, 남성은 부정을 저질러도 능력만 있으면 복귀할 수 있다”는 성차별적 구조의 고착화였다는 것이다. 유감동 사건이 발생한 지 약 50년 후인 성종 시절에는 더 대담한 ‘어우동 사건’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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