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

육군 제28사단 화학지원대 총기 난사사건

경기도 연천에 있는 육군 제28사단(무적태풍부대)은 중서부전선 최전방 지역의 경계 임무를 담당하는 GOP(일반전방초소) 철책사단이다.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일명 ‘별들의 무덤’으로도 불린다. 1959년 대대장의 사단장 살해사건, 2005년 530GP사건, 2014년 윤승주 일병 폭행 사망사건 등이 모두 이 부대에서 발생했다.

1984년 2월 24일 일요일 새벽 양주시 신산리에 있는 28사단 예하 화학지원대 내무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박아무개 이병은 이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새벽 5시 55분쯤 박 이병은 김아무개 상병으로부터 근무교대와 관련해 심한 질책을 받는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내무실에서 잠든 고참들을 한 명 한 명 응시했다. 기상 10분 전인 6시 50분쯤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일어서더니 관물대에 있던 소총을 꺼내 탄창을 장전했다.

부대 보급병이던 박 이병은 위병소 근무를 마친 새벽 12시 10분쯤 탄약고에 들어가 M16소총 2정과 실탄 140발, 탄창 7개를 몰래 빼내 관물함에 숨겨놓았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병들을 죽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이병은 실행을 앞두고 고민했다. 성공하던 실패하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박 이병의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은 선임병들의 질책이었다. 박 이병은 무장을 갖추고 소총의 발사 조절장치를 ‘자동’으로 설정했다.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김 아무개 병장이 있는 왼쪽 침상 쪽으로 총구를 향했다. 이윽고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 순식간에 탄창에 있던 총알이 동료 사병들을 향해 날아갔다.

고요했던 내무실에는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박 이병은 복도로 나가 탄창을 갈아 끼우고 다시 내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한 차례 위협사격을 한 다음 “모두 페치카 옆으로 모여!” 라고 소리쳤다.

겁에 질려있던 동료 사병들이 한쪽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몇 명은 내무실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박 이병은 내무실 한쪽에 모여 있던 동료 사병들에게 다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사병들이 쓰러졌다.

다시 내무실 밖으로 나간 박 이병은 도망치는 사병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총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계급별 사망자는 병장 1명, 상병 4명, 일병 1명, 이병 2명이다. 내무실 바닥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새벽녘에 울린 요란한 총소리는 부대의 정적을 깼다. 이어 비상이 걸렸다. 처음에는 내부에서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적이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 상황병들은 지휘계통을 따라 보고했고, 또 타격대는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출동했다. 박 이병은 총기를 난사한 후 도주했으나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자수했다.

군 수사기관에서 조사가 시작됐다. 박 이병은 범행 동기에 대해 “고참병들의 가혹행위”라고 말했다. 1984년 9월 22일 입대한 박 이병은 이 부대에 전입 온 순간부터 고참병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허약체질로 인해 훈련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졌다. 이로 인해 ‘고문관’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 이병의 보직은 ‘보급행정병’, 고참병들의 이런 저런 요구가 있기 마련이다.

계속되는 구타와 가혹행위, 보급 관련 잡다한 요구가 많아지면서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건 전날 밤에도 고참병들로부터 구타와 얼차려를 받았다.

여기에다 가정사까지 겹치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도 절정에 올랐다. 박 이병의 감정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자신을 괴롭힌 고참병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실행했다.

군 수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선임병들은 박 이병이 타자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 박기를 시키고 구타했다. 또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머리를 구타했으며, 일석점호 도중 손이 불결하다며 머리박기를 하는 등 얼차려를 시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는 서슬 퍼런 5공화국 정권이었다. 언론 통폐합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때였다.

군은 철저하게 사건을 축소·은폐했다. 순직 사병들의 유족들이 뭉치는 것을 막기 위해 8명의 시신은 각각 국군 양주병원과 28사단 의무대 등으로 분산했다. 사건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신속하게 정리했다. 유족들에게도 현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장례는 3일 만에 속전속결로 끝냈다.

외부로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도 잇따랐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다. 사건 직후 3개월 동안 외출·외박을 금지시켜 외부와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통제됐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최 아무개 중사에게는 직무유기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나머지 직속상관들에게는 어떤 처벌이나 조치가 내려졌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연천 530GP사건 김동민 일병 현장검증 모습.

박 이병은 살인, 살인미수, 상관살해미수, 군용물 절도, 항명 등의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1·2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됐고, 대법원에는 상고하지 않았다. 1986년 총살형이 집행됐다. 군에서 이뤄진 마지막 사형 집행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진 것은 2005년 같은 28사단에서 530GP사건이 일어나면서다.당시에도 장병 8명이 사망했고, 4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530GP사건은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고, 유족들은 김동민 일병은 범인이 아니며, 북한과 교전하다가 발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