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생존설’ 전말
1918년 7월17일 새벽, 러시아의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이파티예프 저택.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한때 제국을 호령했던 니콜라이 2세(당시 50세)와 그의 가족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볼셰비키 혁명군은 전선의 위협을 피해 이동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와 황후, 그리고 네 명의 딸과 막내아들을 지하방으로 모이게 했다. 그들은 사진 촬영을 핑계로 황제와 가족들을 벽 앞에 세웠다. 이중에는 넷째 딸인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당시 17세)도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 대신 나타난 것은 총구였다. 야코프 유로프스키가 이끄는 집행 대원들은 판결문을 낭독한 뒤 즉각 방아쇠를 당겼다. 좁은 지하실은 순식간에 화약 연기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와 황후는 즉사했으나, 딸들은 쉽게 목숨을 잃지 않았다. 옷 안감에는 수많은 보석과 다이아몬드가 꿰매어져 있었고, 이것이 방탄복 역할을 하며 총알을 튕겨냈다. 아나스타샤를 포함한 아이들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신음했다. 혁명군은 대검과 개머리판을 휘둘러 이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시신들은 수레에 실려 인근 광산의 구덩이로 던져졌다. 시신의 얼굴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하여 신원을 감추기 위해 황산이 뿌려졌다. 그날 이후, 제국의 마지막 증인들은 사라지는 듯했다.

이후 기묘한 소문이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처형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들 사이에서 “아나스타샤가 현장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거나 “누군가 부상당한 그를 수레에 실어 구출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실제로 혁명군이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숫자가 맞지 않았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렇게 약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벌어진 논란
1920년 2월27일, 독일 베를린의 란트베어 운하로 한 여성(당시 20세 추정)이 몸을 던졌다. 현장에 있던 경찰관이 이를 목격하고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 여성을 구조했다. 몸 곳곳에는 칼에 찔린 듯한 흉터와 총상 자국이 선명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여성은 자신의 신원을 밝히기를 완강히 거부했다.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었던 그는 병원에서 ‘이름 없는 여인’으로 불리며 1년 넘게 수용소와 같은 시설에서 지냈다.
침묵을 지키던 여성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22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군에 의해 황제 일가가 모두 총살당했다는 공식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는 발언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공주의 등장은 전 유럽을 뒤흔든다.
이 정체불명의 여성은 ‘안나 앤더슨’으로 불린다. 안나는 “자신은 총격 직후 기절했을 뿐이며 한 병사의 도움으로 수레에서 구출되었다”며, 그 병사와 함께 루마니아를 거쳐 독일까지 도망쳐 왔다고 설명했다.
안나의 등장은 러시아 망명 귀족들 사이에서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2세의 친척들과 측근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그를 직접 만난 사람들 중 일부는 그가 진짜 아나스타샤라고 믿기 시작한다.
러시아 황실 내부에서만 알 수 있는 은밀한 가정사와 예절, 그리고 가족들만 공유했던 일화들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가까웠던 이들은 그의 눈빛과 얼굴 형태, 그리고 발가락의 기형까지 아나스타샤와 일치한다고 밝힌다. 특히 아나스타샤의 유모와 몇몇 친척들은 그녀의 말투와 습관이 공주와 판박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반대파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가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전혀 못 하고, 독일어만 구사했는데 그마저도 폴란드어 억양이 강하게 섞여 있어 정통 독일인들도 의구심을 가졌다. 아나스타샤는 독일어를 배운적이 없거나 매우 서툴렀으므로, 안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자체가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안나는 “가족을 죽인 자들의 언어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며 심리적 충격에 의한 언어 상실을 주장했다. 가장 결정적인 반대는 아나스타샤의 할머니인 마리아 황태후로부터 나왔다. 황태후는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사기꾼으로 몰아세웠다.

안나 앤더슨은 평생을 아나스타샤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사기꾼이라 비난하는 세력이 팽팽하게 맞섰다. 반대파들은 그가 러시아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는 점과 폴란드 출신의 실종된 공장 노동자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극심한 고초를 겪은 후유증으로 언어를 잊었을 뿐이며, 그의 고귀한 자태는 교육 없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건은 단순한 신원 확인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문제로 번졌다. 만약 그녀가 진짜 공주라면 러시아 황실이 유럽 은행에 맡겨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신원 확인 소송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독일 법원은 결국 “그녀가 아나스타샤라는 증거도 없지만,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는 증거도 부족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적으로는 상속권을 인정받기 위한 충분한 입증을 하지 못한 사실상 패소 결정이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아나스타샤의 생존 여부는 전설이 된다. 1984년 안나 앤더슨이 미국에서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이때까지도 자신이 아나스타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묘비에는 ‘아나스타샤 로마노바’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실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어린 공주가 어디선가 이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환상에 몰입했다.
과학이 밝혀낸 서글픈 마침표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로마노프 가문의 암매장지가 세상에 공개된다. 이곳의 유골과 아나스타샤의 외가 쪽 후손인 영국 에든버러 필립 공(알렉산드라 황후 언니의 손자)의 DNA를 통해 로마노프 가문임이 확인되었다.
안나 앤더슨은 사망 전 수술을 받으며 병원에 생체조직 샘플 일부를 남겨두었는데, 이것과 황실 가족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반면 폴란드의 실종 노동자인 ‘프란치스카 샨츠코프스카’로 확인된다.
당초 의심대로 그는 러시아의 사라진 공주가 아닌 폴란드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는 군수 공장에 다닐 때 폭발 사고로 머리를 다쳐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가 사라졌다.
과학은 그를 가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안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다. 공장 노동자가 어떻게 황실의 예절과 복잡한 가계도를 완벽하게 숙지할 수 있었는가. 유전자 검사 시료가 뒤바뀐 것은 아닌가하는 등의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각에서는 안나(프란치스카)가 정신병원 수용 당시 아나스타샤의 생존설이 담긴 잡지와 기사들을 탐독했으며, 그곳에서 만난 다른 환자나 면회객들로부터 정보를 습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황실 자산을 찾으려는 황실 일족과 망명 귀족들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이런 논란은 2007년 8월, 사라졌던 두 구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묻힌 곳에서 6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나머지 두 구의 유해가 추가로 나온 것이다.
정밀 검사 결과, 이들 중 남성은 실종되었던 황태자 알렉세이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유해를 놓고 러시아 학계와 미국 학계의 의견이 갈렸다. 셋째 딸 마리아와 넷째 딸 아나스타샤인지를 두고 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분명한 것은 5명의 자녀가 모두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1918년 그 차가운 지하실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가족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기까지 89년이 걸렸다.
역사가 남긴 슬픈 그림자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여인의 사기극인지, 혹은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비극인지 명확히 선을 긋기 어렵다. 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어린 황녀를 찾고 싶어 했던 대중의 열망이 안나 앤더슨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러시아 정부는 발견된 유골들이 모두 로마노프 일가의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안나 앤더슨이 베를린의 물속에서 건져 올려진 순간부터 평생을 바쳐 주장했던 그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과학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그 지하실을 빠져나와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다. 안나 앤더슨이 그토록 아나스타샤이고 싶어 했던 이유는, 어쩌면 참혹한 노동자의 삶보다 비극적인 황녀의 삶이 차라리 더 고귀하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사건은 기록된 역사의 빈틈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슬픈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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