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

섬마을 국어 선생님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옛날 사람들이 한양(서울)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길 옆에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 작은 연못에는 ‘연봉정’(蓮峰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이곳에는 해마다 연꽃이 화려하게 피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가객들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정자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이 연못과 정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연정’이라는 지명이 됐다고 한다. 지금은 이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깊은 산골은 아니지만 동네가 산으로 삥 둘러싸여 있다. 문명 생활도 늦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이전까지는 호롱불과 등잔불을 켜고 살았는데, 그때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집집마다 전화가 보급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인근지역이 개발되면서 지형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10년 뒤에는 우리 마을도 어떻게 변해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몇 십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시내버스가 4시간에 한 대씩 다닌다는 것이다. 그만큼 승객 수요가 적다는 뜻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산을 보면서 자랐다. 항상 산 너머가 궁금했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동경했다. 동네 앞에는 큰 저수지가 있는데, 그걸 보면서 섬마을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중학교 1학년(왼쪽), 2학년(오른쪽) 시절.

‘시(詩)’를 좋아해서 학교에 등·하교 때나 산과 들에 나갈 때는 조그만 시집 한 권씩 들고 다녔다. 어느새 시어 속의 바다는 내 꿈이 되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렇다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의 뜻이 그랬다. 나도 교사를 미래의 직업으로 받아들였다. ‘섬마을 국어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넓다란 푸른 바다를 거닐며 아이들과 함께 시를 쓰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재수생 시절.

그런데 대학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가치관의 혼란, 삶에 대한 정체성, ‘올바른 삶’에 대한 고민과 번민이 끊이지 않았다. 1학년 때는 학내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맨 앞에서 쇠파이프 들고 ‘사수대’ ‘결사대’도 해보았다. 정기적으로 이념학습도 받았다.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웠다. 나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하고 싶었는데, 그들은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생각의 도피처로 군대에 갔다.


복학해서는 다른 예비역들처럼 전투복 야상을 입고 도서관에 다녔다. 그냥 임용고시나 열심히 준비해서 교직으로 나가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내 모습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했지만 이런 학교생활은 아니었다. 다시 운동권에 동참하라는 친구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옳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