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교사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깼다. ‘야학 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날 학교 학생회관에 갔다가 ‘야학교사 모집’ 포스터와 마주했다.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학교 위치를 파악한 후 저녁에 덕진구 금암동에 있는 ‘전주 향토학교’를 찾아갔다. 교무주임 선생과 면담을 거쳐 일주일 정도의 수습을 거쳤다. 향토학교 교사들의 수업도 참관하고 다른 야학을 방문하기도 했다. 무척 가슴이 설레는 기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미래 예비교사로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가 받았던 제도권 교육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교육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은 잘못된 교육을 아이들에게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앵무새 교사’가 아니라 ‘참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옷깃에 늘 ‘참교육 배지’를 달고 다녔다.
나는 야학에서 ‘국어’와 ‘역사’를 담당했다. 국어야 내 전공이었고, 역사는 내 관심사였다. 야학도 학교이다 보니 체계가 있다. 그렇다고 학생들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거나 군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제도권 학교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이고, 교사들의 열정도 넘쳤다. 내가 몸담았던 향토학교는 정말 멋진 곳이었다.
배움에 목마르고 사람의 따뜻한 정이 그리웠던 이들에게 야학은 학교라기 보다 해방구 같은 공간이었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학교, 편견없는 교사들, 서로를 위로해 주는 학생들, 일하느라 지치고 힘들어도 야학에 오면 아이들이 행복했던 이유다.
이런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론 가족 같은 그런 관계였다. 나 또한 학생들에게 다정한 친구이자 형이었으며, 오빠였다.

나는 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외우고 줄 치라고 주입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뜨게 했다.
교육방법도 내 방식대로 바꾸었다. 역사시간에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냈고, 국어시간에는 나무와 바람, 하늘, 사람이 있는 곳에서 토론식 수업을 진행했다.

보통 야학은 저녁 6시30분에 수업을 시작한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해가 길기 때문에 6시30분이면 날이 어둡지 않다.
야학교실은 삭막했다. 성냥갑 같은 교실에 칠판과 교탁이 있고, 교실벽의 4분의 3은 흰색으로 4분의 1은 회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시를, 수필을, 소설을 말하기가 싫었다.
국어 시간을 1교시로 빼고, 야학 앞에 있던 전주공설운동장으로 모이게 했다. 그곳에는 나무도 있고, 새도 있고, 바람도 있고, 하늘도 있고,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한쪽에 삥 둘러앉아 그곳에서 서로 돌아가며 시를 읊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그러면서 감정이입을 했다.
내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수업방식에 학생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하나가 됐다. 사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이들도 어느새 이런 수업 방식을 재미있어하고 더 적극적이 되어갔다.

역사 시간도 달랐다. 이야기를 했다. 수업 진도에 맞춰 그 당시의 정치 상황 등과 현실의 정치 상황을 빗대며 이야기식으로 풀었다. 그리고 학생들과 토론을 벌였다.
내 수업방식에 대해 교사들은 의문을 품었다. 겉으로는 문제 삼지 않았지만 모두들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다 좋은데, 야학은 검정고시를 위한 곳인데…”라는 물음표가 붙었다.
나도 교사들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내 수업 방식에 나름 확신이 있었다. 외우라고 강요하는 주입식보다 이해하고 판단하고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야학이나 학생들이 교사의 실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검정고시 합격’인 것은 당연하다. 검정고시에 최대한 합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내 학습방식을 지키면서 학생들을 검정고시에 합격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몇 가지를 준비했다. 우선 검정고시에 나올만한 핵심내용을 A4 한 장에 정리했다. 여기에는 내가 밑줄 긋고, 별표도 쳤다. 수업이 끝나기 전 10분은 ‘검정고시 대비 시간’이었다. 이렇게 하려니 나는 수업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1992년에 실시된 대입검정고시에서 응시자 21명 중 8명이 합격함으로써 최다합격자를 냈다. 보통은 4~5명이 합격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이 열정적으로 잘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교감 선생님 포함,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