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클릭해외화제

낙찰과 동시에 찢어진 뱅크시 그림이 ‘300억’


한쪽에는 뱅크시(Banksy)가 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영국 브리스틀의 어두운 골목길을 무대로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경찰의 단속을 피해 미리 준비한 종이 도안 위에 스프레이 물감을 뿌리는 기법으로 도시 곳곳에 사회 풍자적인 그림을 남겼다.

반전, 반자본주의, 그리고 권력을 향한 날카로운 야유가 그의 단골 소재다.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도 철저히 가명과 복면 뒤에 정체를 숨긴 채, “예술품은 박물관의 유리벽 뒤가 아니라 대중이 숨 쉬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외쳐온 길거리 예술의 상징이다.

다른 한쪽에는 소더비(Sotheby’s)가 있다. 1744년 영국 런던에서 서적 경매로 시작해 수백 년의 역사를 쌓아 올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미술품 경매 회사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자산가와 수집가들이 모여들어 수백억 원을 호소하는 예술품을 거래하는 곳이며, 자본주의 미술 시장의 견고한 성채이자 권력 그 자체로 통한다.

이처럼 예술을 자본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거리의 반항아와, 예술에 가장 비싼 가격표를 붙이는 상류사회의 심장이 무대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30cm의 틈새에 숨겨진 비밀 기계

2018년 10월5일 저녁,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소더비 매장은 여느 때처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자산가들과 미술계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객석의 열기가 정점에 달했을 무렵, 베일에 싸인 길거리 예술가 뱅크시의 대표작 ‘풍선을 든 소녀'(Girl with Balloon)가 경매대에 올랐다.


화판 위에 캔버스 천이 아닌 종이를 얹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시작부터 거센 입찰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경매사의 현란한 몸짓과 함께 가격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마침내 “탕, 탕, 탕!” 낙찰을 알리는 작은 나무망치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최종 낙찰가는 104만 2000파운드( 당시 환율로 약 15억 원)였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낙찰을 자축하는 박수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액자 내부에서 날카로운 기계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액자 아래쪽으로 캔버스 그림이 스르륵 내려오며 국수 가닥처럼 세로로 가늘게 잘려 나갔다.

원래의 작품(왼쪽)과 분쇄기로 반쯤 잘려나간 그림(오른쪽).

경매장은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에 휩싸였다. 일부 관객은 이것이 경매회사가 준비한 특별한 연출인지 의심하며 눈을 비볐고, 직원이 급히 달려가 작품을 벽에서 떼어낼 때까지 분쇄기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기계의 작은 오작동 덕분에 그림은 정확히 절반만 잘린 채 액자 중간에 걸쳐졌다. 미술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도 충격적인 기습 시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사건 직후 세상의 시선은 ‘누가, 어떻게, 왜’라는 질문으로 쏠렸다. 뱅크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짧은 영상을 올리며 본인의 소행임을 인정했다. 그는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의 말을 빌려 “파괴하려는 충동은 곧 창조의 충동이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비하인드 영상 속에서 그는 수년 전, 언젠가 자신의 작품이 돈으로만 환산되는 경매장에 매물로 나올 것을 예상하고 액자 내부에 비밀리에 문서 분쇄기를 장착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두꺼운 나무 액자 밑바닥에는 가로 약 30cm 크기의 소형 분쇄 날과 이를 구동할 배터리가 숨겨져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비화가 존재한다. 뱅크시는 원래 그림 전체를 완전히 갈아 끼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는 나중에 추가로 공개한 영상에서 연습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실험실에서는 그림 전체가 깔끔하게 아래로 통과하며 분쇄되었다. 그러나 경매 당일에는 이 장치가 수년간 액자 속에 방치되어 있었던 탓인지, 혹은 배터리의 전압이 부족했는지 절반쯤 내려오다 멈춰 섰다.

이 작은 오작동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림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면 단순히 ‘사라진 예술’이 되었겠지만, 반만 잘려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면서도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새로운 예술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보안을 뚫은 ‘스위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당시 소더비 측은 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에 시달렸다. 작품의 무게가 일반 액자보다 훨씬 무거웠고, 경매장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철저한 보안 검사를 거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더비 측은 “예술가가 액자 자체를 하나의 작품 구성 요소로 지정해 두었기 때문에, 손상을 우려해 내부를 열어보지 않는 것이 관례”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렇다면 그 삼엄한 현장에서 분쇄기를 작동시킨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장치는 원격 무선 신호로 구동되는 방식이었다. 사건 당시 경매장 뒷줄에 서 있던 한 남성이 단추 모양의 리모컨을 누르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그가 현장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였다는 목격담이 전해졌다.

경매 당시 낙찰 순간 관객들 사이에서 단추 모양의 리모컨을 누른 남성이 있었다(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미술계에서는 뱅크시 본인이거나 그의 조력자가 관객들 사이에 섞여 앉아 낙찰 순간을 기다렸다가 직접 버튼을 눌렀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경매에 나오기 전, 뱅크시 본인이 설립한 인증 기관을 통해 ‘손상되지 않은 진품’임을 보증받은 상태였다. 즉,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 가치를 스스로 보증해 주며 몸값을 올린 뒤,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이를 제 손으로 부수는 치밀한 연극을 준비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미술 시장이 예술을 오직 돈으로만 평가하는 행태를 꼬집으려 했던 뱅크시의 의도는 성공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술 시장의 거대한 자본은 뱅크시의 날카로운 송곳조차 집어삼켜 버렸다.


경매가 끝난 후, 소더비와 작가 측은 협의를 통해 이 사건이 단순한 작품 훼손이 아니라 ‘경매 도중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창조된 최초의 예술’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작품의 이름 역시 기존의 ‘풍선을 든 소녀’에서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쓰레기통으로 향한 그림의 가치

전화위복을 맞이한 사람은 최초 낙찰자였다. 그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내가 단순히 그림 한 점을 산 게 아니라,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사게 되었다”며 대금을 그대로 지불하고 작품을 인수했다.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1년 10월, 이 반쯤 잘려 나간 작품은 다시 한번 같은 소더비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는 놀라웠다. 전 세계 수집가들의 치열한 눈치싸움 끝에, 이 작품은 처음 낙찰가의 18배가 넘는 1858만 파운드(약 300억 원)에 최종 낙찰되었다. 미술 시장을 조롱하려던 예술가의 몸짓이, 오히려 시장의 가치를 천문학적으로 폭등시키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반쯤 파쇄된 그림은 몇년 후 300억원에 낙찰됐다(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액자 틀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가늘게 찢어진 종이 조각들, 그리고 그 위에서 겨우 살아남아 하늘로 날아가는 작은 붉은 하트 모양의 풍선. 이 기묘한 형태의 작품은 오늘날 현대 미술이 마주한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뱅크시는 미술품을 그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나 투자 상품으로만 여기는 세태를 향해 강렬한 경고를 날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액자를 부수고 그림을 찢음으로써 시스템의 균열을 시도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 찢어진 상처마저도 고유한 디자인으로 포장해 더 비싼 가격표를 붙여버렸다.

예술가가 거대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해 휘두른 망치는 역설적이게도 그 시스템의 가치를 더 단단하게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거리를 떠돌며 권력과 자본을 거침없이 풍자하던 뱅크시의 날카로운 칼날은 이제 미술관의 가장 안전하고 화려한 유리벽 뒤에 모셔져 있다.


뱅크시가 쏘아 올린 분쇄기의 굉음은 멈춘 지 오래지만,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예술의 진짜 가치는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찢어진 종이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