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

창수와 선경이


야학교사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학교가 술렁였다. 18세의 남자아이 창수와 선경이가 학교를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학교 운영책임을 맡고 있던 교감 선생님께서 극구 반대하셨다.

두 아이들은 내가 야학에 오기 전 대입검정고시반 소속이었다. 이들은 어느 날 학교에 국어, 영어, 수학과목의 수업만 듣겠다고 했지만 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학교를 뛰쳐나갔던 것이다.

야학이 정규학교는 아니지만 수업을 골라 듣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두 아이들 뜻대로 받아들였다면 다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이렇게 되면 학교 수업 체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국·영·수만 수업을 받을 생각이면 차라리 단과학원에 등록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석달이 지난 후 창수와 선경이는 다시 야학에 찾아왔다. 학교 방침대로 수업을 듣겠으니 다시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절대 받아줄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교사들은 교무회의를 열어 두 아이들을 받아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아이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을 야학에서조차 받아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었다.

또 아이들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던 청소년들이었다.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고 그럴 나이였다. 이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오겠다는 것이니 받아줘야 한다는 게 교사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감선생님의 입장은 달랐다. 학교 운영을 맡고 있으니 원칙론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게 교사들과 교감선생님은 팽팽히 맞섰다. 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은 당시 예비역이었던 세 명의 교사였다. 나와 윤영태, 박종인 선생이었다.

공교롭게도 세 명은 국어, 영어, 수학을 담당하고 있었다.

교감선생님과 교사들의 릴레이 회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 됐다.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가슴앓이를 하며 지켜봤다. 우리는 약 한 달간의 시간을 갖고 대화와 타협을 시도했지만, 교감선생님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 명의 교사들은 “학생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나가겠다”며 배수의 진을 쳤다. 그래도 교감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우리는 갑작스럽게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우리 셋은 거의 매일 전주 시내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학교와 아이들이 너무 그리웠다. 그 쓰리고 아픈 마음을 소주로 채웠다. 우리가 학교를 떠나면서 교사들과 학생들도 동요했다.

고입 검정반에서 수학을 담당했던 한 여교사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님, 학교로 돌아오세요!!!
정락인 선생님!
선생님이 안고 나가셨을 실망감과 쓰라림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만남은 헤어짐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갑니다. 그럼 헤어짐은 다시 만남으로도 부활할 수 있겠지요 (나의 억지!) 하고 싶은 일 하는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대요.
그 순간들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뜻을 펼칠수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아직도 하지 못한 일들과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요? 해야할 일과 해야될 말도 많이 남아있어요.
아직 제대로 시도조차 하시지 못하고 성급한 발검음을 재촉하셨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답니다. 남아있는 학생들을 버릴만큼 큰 뜻을 가지고 떠나셨나요? 세 분이 떠나버린 교무실과 빨개진 눈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눈물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의 빈 자리는 계속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선생님들께서 그 자리를 다시 채워주시기를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서 차츰차츰 변화를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시행착오의 시기이고 이번일만해도 어떤 것이 객관적이고 옳은 것인가를 단정하기는 힘들잖아요.
입과 손은 입과 귀보다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보다 실천이 더 힘들다고 하더군요.
야학에 관해 많이 고민하시고 많이 들으시고 공부하셨으면 이제는 실천에 옮겨야지요. 마무리가 옳았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어요. 없었던 것처럼 가장하시려는 남은 선생님들과 모두의 안타까운 눈망울에 이 곳과 이 학생들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할지 난감합니다.
“진정한 위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의문이 일어납니다. 다시 얼굴을 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애초부터 다시 오실거면 나가시지도 않으셨겠지만 선생님을 사랑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존경하고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다시 서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학생들에게 인간이기에 줄 수 있는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날까지 안녕!
1992년 5월 23일 새벽
너무큰 충격에 잠을 이룰수 없어서 00이가 드립니다.

학교를 나온 후 일주일 쯤 지나자 교감 선생님께서 “세 분 선생님들 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우리가 나간 후 교감 선생님의 마음이라고 편했을 리 없다. 얼마나 속상하고 애를 태우셨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우리 셋을 만난 교감 선생님은 조건부로 아이들의 복학을 허용했다. “세 선생님들이 창수와 선경이를 책임진다면 받아 주겠다”고 했다. 교감 선생님이 고심 끝에 내놓은 묘수였다. 우리는 이 제안을 흔쾌히 다.

윤영태 선생과 박종인 선생은 고입검정고시반을 맡고 있었고, 나는 대입검정반을 담당하고 대검반 부담임을 맡고 있었다. 결국 두 아이들은 내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됐다. 그렇게 향토야학은 큰 홍역을 치렀다.

창수와 선경이는 처음에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루 이틀 빠지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는 아이들의 집에 찾아갔다. 교감 선생님과 다짐했던 ‘책임’과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른 교사들 보다 먼저 교무실에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창수가 들어왔다. 다짜고짜 “선생님, 국·영·수 수업만 받겠습니다”라고 통보하듯 말하고는 교무실을 나갔다.

나는 너무 황당스러웠고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창수(메인사진 왼쪽에서 세번째)를 교무실로 불러와서는 빗자루를 집어들어 종아리를 몇 차례 때렸다. 이런 행동 때문에 어렵게 학교에 복학했는데, 또다시 반복하는 것을 보고 ‘욱’하고 말았다.

나는 창수에게 매질을 한 후 두고두고 후회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마음이 아프다.

창수와 선경이는 그 후 치러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학교를 떠났다. 나도 야학을 그만둔 후 아이들과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14년 3월23일 선경이가 내 블로그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김선경’이라는 이름과 ‘그리운 선생님’이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먹먹했다.

창수와 선경이는 각자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극복하며 한 집안의 가장이 됐다고 했다. 너무 고마운 아이들이다.


박영수 교감 선생님과도 이전에 간접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2007년 5월 연합뉴스에 교감선생님 이야기가 소개됐는데 그걸 보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했더니 댓글을 남기셨다. 교감 선생님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창수와 선경이’ 일도 있었지만, 야학교사를 할수록 교직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제도권의 교육 현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한숨이 나왔다. 학교에서 교사의 위치란 새장 속에 갇힌 날개 잃은 새처럼 자율성이 없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교사로서의 내 모습.

교육을 바로 세우려면 아이들을 등져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면 교육의 모순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하는 나약한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세상을 모른 체하고 ‘사랑’만을 내세우는 위선자가 되기는 싫었다. 그렇게 교사에 대한 물음표가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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