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

미각의 천재가 벌인 희대의 와인 사기극


한 남자가 전 세계 부호들의 지갑과 자존심을 동시에 짓밟았다. 이른바 ‘닥터 콘티’로 불리며 전 세계 와인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인물의 이야기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와인을 제 손으로 빚어내며 억만장자들을 속인 그의 사기극은 와인 역사상 가장 기상천외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허영심과 와인 시장의 맹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인도네시아 출신의 청년

200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급 와인 사교계에 한 젊은 아시아계 남성이 등장한다. 1976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루디 쿠르니아완이었다. 그는 자신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홍콩 유통업계 큰손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매달 수백만 달러(USD, 한화 수십억 원)를 아낌없이 쓰며 희귀 와인을 사들이는 그의 모습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무기는 돈뿐만이 아니었다. 루디는 한 번 맛본 와인의 포도 품종과 생산 연도(빈티지)를 정확히 맞히는 천재적인 미각을 지니고 있었다.
포도주 잔을 흔드는 손길은 우아했고, 향을 맡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눈을 가린 채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고는 이내 잔에 담긴 술의 이름과 생산된 해, 심지어 포도가 자란 밭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맞춰냈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사교계를 홀린 사기범 루디 쿠르니아완.

시음회 광경을 지켜 본 미국의 억만장자들과 유명 수집가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해박한 와인 지식과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그는 금세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와인인 ‘도멘 드 라 로마네 콘티'(DRC)를 유독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 사람들은 그를 ‘닥터 콘티’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추앙했다.


당시 고급 와인 시장은 호황기를 맞아 가격이 치솟고 있었다. 루디는 자신이 수집한 와인을 경매에 내놓기 시작했다. 2006년 한 해 동안 그가 경매를 통해 판매한 와인 액수만 최소 3000만 달러(한화 약 400억 원)에 달했다. 자산가들은 그가 보증하는 와인을 사기 위해 백지 수표를 내밀었다.

부엌에서 태어난 전설, 30m 공간의 비밀 실험실

완벽해 보였던 그의 사기극은 뜻밖의 장소에서 제동이 걸린다. 2008년 뉴욕의 한 유명 경매장에 프랑스 부르고뉴의 명문 양조장인 ‘도멘 퐁소’의 소유주, 로랑 퐁소가 직접 나타났다. 루디가 경매에 부친 와인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목록을 본 퐁소는 눈을 의심했다. 루디가 내놓은 와인은 ‘도멘 퐁소 클로 드 라 로슈’ 1945년산과 1949년산이었다. 하지만 이 와이너리에서 해당 와인을 처음 생산한 해는 1961년이었다. 즉,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와인’이 엄연히 진품으로 둔갑해 경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퐁소의 강력한 항의로 해당 와인은 경매에서 철회되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루디를 철석같이 믿었던 와인 수집가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의혹은 꼬리를 물었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착수했다. 2012년 3월, 수사관들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루디의 자택을 급습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광경은 사교계의 신화와는 동떨어진, 기괴한 공장이었다.

FBI가 루디의 집을 급습했을 때 나온 가짜 와인 라벨과 위조된 코르크 마개.

루디의 집은 고급 와인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비밀 실험실이었다. 방 안에는 수천 장의 가짜 와인 라벨과 위조된 코르크 마개, 프랑스산 특수 접착제, 그리고 정교하게 제작된 고무도장들이 가득했다.


사기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치밀했다. 그는 100달러(USD) 안팎의 저렴한 캘리포니아산 와인과 적당한 가격의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정교한 비율로 섞었다. 그리고 이를 수집가들로부터 구한 진품 공병이나 미리 준비한 가짜 병에 담았다.

FBI가 루디의 집을 급습했을 때 나온 가짜 와인 라벨과 위조된 코르크 마개.

여기에 오래된 먼지를 입히고 코르크를 깎아 수천만 원짜리 올드 빈티지 와인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천재적인 미각은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맛을 똑같이 흉내 내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FBI가 루디의 집을 급습했을 때 나온 가짜 와인 라벨과 위조된 코르크 마개.

베일에 싸인 자금줄과 드러나지 않은 가짜들의 행방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가 주장했던 ‘홍콩 유통가 자제’라는 신분도 거짓으로 밝혀졌다. 사실 그의 집안은 인도네시아에서 거대한 금융 사기 사건에 연루된 도망자 가문이었다.

그의 외삼촌들은 199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를 흔든 은행 사기극의 주역으로, 수천억 원의 자금을 횡령한 뒤 잠적한 상태였다. 루디가 와인 시장에서 펑펑 썼던 막대한 자금의 출처 역시 이 범죄 자금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타인의 돈으로 쌓아 올린 가짜 신분으로,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 부호들을 속인 셈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에게 속은 피해자들의 태도였다. 억만장자 수집가인 빌 코크는 사설 탐정까지 고용해 루디의 사기 행각을 밝혀내는 데 앞장섰다. 반면, 일부 자산가들은 루디의 사기가 드러난 후에도 자신들이 산 와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산 것은 와인의 맛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마신다’는 특권의식과 허영심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지는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는 가짜 와인을 조용히 마셔 없애거나 그대로 보관하기도 했다.

2013년 뉴욕 연방법원은 루디 쿠르니아완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아울러 2800만 달러(USD)의 배상금 지급과 자산 몰수 명령을 내렸다. 미국 역사상 와인 위조 범죄로 실형을 살게 된 첫 번째 사례였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2020년 11월에 만기 출소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이 없었기에 2021년 고국인 인도네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24년을 전후해 들려온 소식은 와인계를 다시 한번 당황하게 만들었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그가 현지 자산가들의 비호 아래 다시 와인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만든 가짜 와인과 진품 와인을 비교하는 시음회를 열며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이라는 근황이 전해졌다.

과거에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었던 가짜 포도주가, 이제는 그의 천재적인 미각을 증명하는 하나의 상품이 된 셈이다. 수많은 자산가들이 여전히 그의 손에서 태어난 가짜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가 유통한 가짜 와인은 수만 병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전 세계 누군가의 와인 셀러에 진품의 얼굴을 한 채 숨어 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쫓는 가치는 본질에 있는가, 아니면 눈앞의 화려한 포장지에 있는가. 오늘도 누군가는 루디가 정교하게 조작한 가짜 라벨을 바라보며, 전설적인 빈티지의 깊은 맛에 감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디 크루니아완의 사기 행각과 영화 같은 스토리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포도밭의 사기꾼들>(Sour Grapes, 2016)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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