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과 르윈스키’ 백악관 불륜 스캔들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큰 키와 수려한 외모,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연설 능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기에 서민적인 친근함까지 갖춘 클린턴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차가운 이성과 치밀한 정책으로 미국 경제의 전성기를 이끌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카메라가 꺼진 백악관의 안쪽 깊은 곳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가 숨어 있었다. 바로 멈추지 않는 은밀한 사생활과 복잡한 여성 편력이었다.
사실 클린턴의 여성 문제는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 아칸소주 지사 시절부터 끊임없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의 주변에는 늘 성추문 루머가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위기 극복 능력과 정치적 파괴력으로 매번 논란을 잠재웠다.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은 여성 문제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정치인”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백악관이라는 미국 최고 권력의 심장부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의 위험한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눈과 귀가 감시하는 삼엄한 공간이었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오는 자만심과 개인적인 취약성은 결국 그를 통제 불능의 길로 이끌었다. 가장 안전하고 은밀해야 할 대통령의 사적 공간이 역사상 가장 커다란 스캔들의 무대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집무실 옆 작은 방, 비밀의 시작
시간은 1995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갓 졸업한 22세의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Lewinsky)는 백악관의 무급 인턴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큰 눈망울과 활발한 성격을 가진 르윈스키는 곧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녀가 일하던 곳은 대통령의 주 집무실과 아주 가까웠다.
그해 11월, 의회와의 예산 갈등으로 미 연방정부가 일시 폐쇄(셧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식 백악관 직원들이 대거 무급 휴직에 들어가 공백이 생기자, 인턴이었던 르윈스키가 임시로 전화를 받고 심부름을 하며 대통령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의 위험한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후 약 18개월 동안 백악관 안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갔다. 주로 대통령 집무실 옆에 붙은 작은 서재나 화장실이 무대였다. 르윈스키는 훗날 조사에서 대략 9차례 이상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7세였다. 백악관의 경비 시스템도 대통령의 개인적인 공간까지는 세세하게 감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악관 비서진은 뒤늦게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인턴 신분인 르윈스키가 대통령 주변을 너무 자주 맴돌았기 때문이다. 1996년 4월, 백악관은 르윈스키를 국방부(펜타곤) 대변인실로 전근 보냈다. 대통령과 떼어놓기 위한 조치였다.
르윈스키는 멀어진 환경 때문에 외로워했다. 이때 국방부에서 만난 동료가 바로 린다 트립(Linda Tripp)이었다. 트립은 르윈스키보다 24세나 많았고, 르윈스키는 그녀를 어머니나 친한 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르윈스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대통령과의 비밀을 트립에게 전부 털어놓는다.
트립은 평범한 동료가 아니었다. 과거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백악관에서 일하다가 클린턴 정부 들어 밀려난 인물로, 현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권력층의 위증 압박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계산도 서 있었다.
트립은 1997년 가을부터 르윈스키와의 통화를 몰래 녹음하기 시작한다. 녹음된 분량만 20시간에 달했다. 르윈스키가 울먹이며 대통령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테이프에 담겼다.

세탁하지 않은 파란색 드레스의 비밀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다른 성추문 재판 때문이었다. 당시 클린턴은 아칸소주 주지사 시절 주 정부 직원이던 폴라 존스를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당한 상태였다. 존스의 변호인단은 클린턴의 상습적인 행태를 입증하기 위해 백악관 내부를 뒤진다. 이때 트립은 녹음 파일을 평소 친분이 있던 공화당 성향의 변호사들에게 넘겼다.
1998년 1월, 언론의 보도로 스캔들이 세상에 공개되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막강한 변호인단을 앞세워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법원에 소환된 클린턴 대통령은 선서를 한 뒤 “르윈스키와 성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뒤이어 1998년 1월 26일,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도 국민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여성, 르윈스키 양과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요.”

이 단호한 부인은 언론과 대중을 설득하는 듯했다. 정치권에서도 대통령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사생활을 과도하게 공격한다는 옹호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트립은 또 하나의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르윈스키는 트립과 통화하면서 결정적인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다. 바로 클린턴과 은밀하게 만날 때 입었던 파란색 드레스다.
르윈스키는 트립과의 통화에서 “대통령의 체액(정액)이 묻은 드레스를 세탁하지 않고 보관 중”이라고 했고, 트립은 “‘사랑의 증표로 남겨두라’거나 ‘나중에 너를 보호할 무기가 될 것'”이라며 절대 세탁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르윈스키는 이 말을 믿고 드레스를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클린턴은 ‘성적 관계’에 대한 정의를 법적으로 교묘하게 비틀며 위증 혐의를 피해 가려 했으나, 트립의 제보를 받은 특별검사팀이 르윈스키의 옷장에서 이 드레스를 확보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연방수사국(FBI)에 의뢰한 DNA 검사 결과, 드레스의 얼룩과 클린턴의 DNA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적 증거 앞에 대국민 거짓말이 송두리째 들통나는 순간이었고, 그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1998년 8월, 클린턴은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르윈스키 미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사실”이라며 “나의 잘못이며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과했다. 만약 이때 드레스를 세탁했다면, 클린턴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며 위기를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르윈스키의 말 한마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셈이다.

미국 하원은 1998년 12월,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죄목은 국민 앞에서의 거짓말(위증)과 수사를 방해한 혐의(사법방해)였다. 대통령의 자리가 완전히 박탈당할 위기였다.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할 최종 탄핵 심판은 1999년 2월 연방 상원에서 열렸다. 결과는 부결이었다. 대통령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면 상원 의원 100명 중 3분의 2인 67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증 혐의는 찬성 45표(반대 55표), 사법방해 혐의는 찬성 50표(반대 50표)에 그쳐 탄핵 정족수에 미달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제’가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보기술 산업의 호황으로 최대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클린턴의 지지율 또한 70%가 넘는 고공행진 중이었다.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도덕성에는 실망했지만, “일 잘하는 대통령을 바꿀 필요는 없다”며 클린턴을 지지했다.
클린턴은 남은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퇴임 후에도 세계적인 지도자이자 강연가로 화려한 삶을 이어갔다. 그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 역시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이후 국무장관을 거쳐 대선 후보의 자리까지 올랐다.
반면 사건의 다른 한 축이었던 르윈스키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언론과 대중은 거대한 권력을 가진 중년의 대통령보다,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에게 훨씬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녀의 몸무게, 옷차림, 과거 행적이 매일 전광판에 걸렸다.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이자 성적 희화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디를 가도 ‘대통령을 유혹한 밀회의 주인공’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대 중반의 여성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세상의 시선이 너무나 차가웠다.

흘러간 시간, 그리고 남겨진 질문들
세월이 흘러 스캔들의 주인공들도 나이를 먹었다. 르윈스키는 긴 침묵을 깨고 평화운동가이자 반(反)사이버 폭력 대변인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 강연에서 “22세의 나이에 상사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상사가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점이 내 삶을 통째로 바꿨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저는 하룻밤 사이에 개인의 명예를 완전히 잃어버린 최초의 사람이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던 피해자였다”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이제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언어폭력과 괴롭힘을 막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과거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을 택한 편이다.
반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과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을 두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르윈스키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전하는 일에는 여전히 인색한 태도를 취했다.
백악관의 화려한 조명 뒤에서 벌어졌던 이 비밀스러운 사건은 우리에게 여전히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권력자의 거짓말은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대중과 언론이 쏟아낸 비난의 칼날은 과연 공정했는가. 화려했던 권력의 역사 뒤편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짙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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