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시체들의 행렬 ‘강시 전설’의 슬픈 역사
양팔을 앞으로 길게 뻗은 채 기괴한 몸짓으로 밤길을 뛰어다니는 귀신. 우리에게 영화 속 캐릭터로 익숙한 ‘강시'(殭屍)의 대중적 이미지다. 청나라 관복을 입고 이마에 노란 부적을 붙인 이 기이한 존재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전역의 공포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무서운 전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귀신 이야기보다 더 기묘하고 가슴 먹먹한 역사의 풍경이 자리 잡고 있다. 죽은 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걷게 만들었다는 강시 전설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고향 땅을 밟고 싶은 영혼들
과거 중국인들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에 묻히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이 삶을 마감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타지에서 세상을 떠나더라도 반드시 고향 땅에 묻혀야만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뿌리 깊은 신앙이다. 만약 타지에서 목숨을 잃고 고향 땅에 묻히지 않으면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된다고 믿었다.
문제는 후난성 서부 상서(湘西) 지역의 지형이었다. 이곳은 가파른 절벽과 좁은 산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마차가 다닐 수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군벌들의 내전과 중일전쟁 등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멀리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나 전쟁터에서 숨진 군인들이 급증했다. 이들의 가족은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지만, 험난한 산길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이들이 바로 ‘간시장'(赶尸匠)이라고 불리는 전문 시체 운반꾼들이었다. 이들은 유족들의 의뢰를 받아 타지에 방치된 시신들을 묶어 한밤중에 고향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들은 험한 산길에서 시신을 효율적으로 옮기기 위해 독특한 운반 방식을 고안했다. 먼저 시신 여러 구를 일렬로 세운 뒤, 양 겨드랑이 사이로 길고 단단한 대나무 장대를 꿰어 하나로 묶았다. 그리고 앞과 뒤에서 인부 두 명이 이 대나무 장대의 양 끝을 어깨에 메고 걸었다.

멀리서 보면 대나무 장대는 시신들의 넓은 옷소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이 걸을 때마다 대나무 특유의 뛰어난 탄성 때문에 장대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이 때문에 야간에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시신들이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한 채 스스로 콩콩 뛰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단단하게 굳는 사후경직 현상 탓에 관절을 꺾지 못해 뻣뻣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공포감을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화 속 강시가 팔을 앞으로 뻗고 점프를 하는 독특한 동작은 바로 이 운반 방식이 와전되면서 굳어진 이미지였다.
밤에만 움직이는 그림자들
그들의 이동은 철저하게 어둠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낮에는 시신의 부패가 빨라지고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시장이 맨 앞에서 작은 청동 징을 울리거나 방울을 흔들며 길을 열면, 그 뒤로 기이한 행렬이 뒤따랐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길고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노란 부적을 붙인 시신들이 팔을 앞으로 뻗고 뻣뻣한 동작으로 위아래로 들썩이며 걸어갔다고 한다. 징 소리는 주변 주민들에게 “시신이 지나가니 문을 닫고 개를 묶어두라”는 경고의 신호였다.
아무나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체 운반꾼이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조건이 따랐다. 일단 나이는 16세 이상, 키는 170cm 이상으로 신체 능력이 우수해야 했다. 밤새도록 무거운 시신들을 메고 험한 산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담력도 필수였다.
외모는 준수한 얼굴보다는 잡귀를 쫓아내고 시신의 음기를 누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일부러 험상궂거나 투박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선호했다. 가장 특이한 시험은 무거운 물체를 메고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오르는 능력이었다. 가파른 산악 지대에서 시신의 무게를 견디며 균형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훈련 과정도 독특했다. 스승은 한밤중에 일부러 나뭇잎이나 특정 물건을 깊은 산속 공동묘지에 숨겨둔 뒤, 제자에게 혼자 가 그것을 찾아오도록 시켰다. 시신과 어둠에 대한 공포를 완벽하게 극복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이들은 시신을 다룰 때 독특한 민간 약초 비법을 사용했다. 시신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수분을 흡수하는 특수한 약초 가루를 몸 전체에 바르고, 얼굴에는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고 훼손된 안면을 가리기 위해 진흙이나 종이를 덮었다. 주술적으로는 시신의 혼이 빠져나가거나 잡귀가 드는 것을 막고자 그 위에 성명과 생년월일을 적었는데, 이것이 훗날 영화 속에서 얼굴에 붙이는 노란 부적의 모티브가 되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 운반꾼들을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죽은 자와 늘 함께 지낸다는 이유로 이들이 지나가면 소금을 뿌리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이 때문에 운반꾼들은 일반 주막에 묵지 못하고, 산속 외딴곳에 마련된 전용 숙소인 ‘시잔(屍棧)’에서만 밤을 지새워야 했다.
시잔은 문턱이 아주 높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이는 밤사이에 시신이 사후경직으로 인해 굳어 밖으로 쓰러지거나 굴러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구조적 장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간에서는 “강시는 무릎을 굽히지 못해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괴담으로 발전했다.

어둠 속에 남겨진 애환
194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중국에 도로가 닦이고 자동차를 이용한 운송 수단이 발달하자, 이 기이한 직업은 역사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신정부 차원에서도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오늘날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대나무 장대를 이용한 운반법이라는 합리적인 설명이 나왔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존재한다. 좁고 가파른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나 90도에 가까운 급경사의 바위산을 넘을 때, 단 두 명의 인간이 어떻게 수백 킬로그램(kg)에 달하는 여러 구의 시신을 통제하며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과학적 설명이 부족하다.
살아선 밟지 못했던 고향 땅을 향해,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몸을 대나무 장대에 의지한 채 한 걸음씩 집으로 향했던 사람들. 그들이 남긴 콩콩 소리는 공포의 비명이 아니라, 영혼을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며 어둠 속에서 나직하게 부르짖던 가난한 이들의 가장 간절한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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