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

교사의 꿈을 접고 기자를 선택한 이유


대학 3학년 때 국어교육과 절친이던 유일환이 사범대 학생회장(현 분당신문 편집장)에 당선됐다. 그는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4년 동안 중단됐던 청사문화(사범대 문예지)를 복간하겠다”고 공약했다.

얼마 후 나를 찾아왔는데, 대뜸 “네가 청사문화 편집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처음에는 사양했다. 이때까지도 임용고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덜컥 맡았다가는 시험 준비에 차질을 빚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일환이는 집요했다. 한번 시작된 부탁은 계속됐고, 도와달라는 말을 거절하기도 어려운 입장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게 충족되면 맡겠다며 조건부 수락을 했다.

크게 두 가지였다. 단독 예산을 편성해 주고, 독립적인 업무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는데, 일환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중에 사범대 전체 학생이 참여한 사범대학생 연석회의를 개최해 ‘교지편집위원회’를 사범대 학생회 소속이 아니라 독립기구로 만들었고, 예산도 별도로 책정하도록 했다. ‘청사문화’는 ‘청사문학’으로 바꿨다. 여기에 하나 더해 편집위원회 사무실까지 만들어줬다. 처음에는 사범대 여학생회 사무실 한 켠을 막아서 편집위원회 사무실로 썼다. 그러다 강의실 하나를 사범대 여학생 휴게실로 만들었는데, 그중 일부를 합판으로 칸막이를 쳐서 ‘편집위원회 사무실’로 꾸몄다.

사범대 학생회 사무실 보다 넓었다. 학생회장인 일환이는 내게 모든 편의를 우선해서 챙겨줬다. 그건 어떻게든 중단된 사범대 문예지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이젠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현실은 너무 열악했다. 컴퓨터 286 한 대가 있었는데, 사범대 학생회에서 쓰던 것을 가져온 것이었다. 사양이 낮고 오래 쓰던 것이다 보니 화면도 흐렸고, 작업하다가 꺼지는 일도 많았다. 나는 그것을 갖고 밤낮으로 씨름했다. 얼마 후에는 ‘청사문학 예비호’도 펴냈다.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어느 비오는 토요일로 기억된다. 같은 과 친구이던 A가 승용차를 타고 와서 사범대 앞에 주차해 놓더니 학생회장인 일환이와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급하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냐고 했더니 “청사문학으로 편성된 예산이 있지 않느냐”며 졸랐다.


일환이와 나는 “공금을 빌려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돈이 그런 것이었다. 친구의 계속된 부탁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꼭 갚겠다”는 약속을 믿고 결국 빌려주고 말았다.

역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다. 그 친구는 돈을 갚겠다는 일자에 갚지 않았고, 약속을 어겼다. 일환이는 청사문학을 발간한 후 나를 차기 사범대 학생회장으로 밀려고 했었다. 그래서 학생회장 선거 전에 청사문학을 펴내서 시너지를 극대화 할 생각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생각에 반대했다. 회장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찌 됐든 내가 아니더라도 청사문학 발간으로 차기 회장 선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A때문에 차질을 빚었던 것이다. A는 일환이와 내 애간장을 태웠다. 청사문학을 발간할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정작 인쇄할 돈은 다른데 가 있었다. 있는 속 없는 속을 다 태우고, 애간장을 녹이더니만 돈을 갚기로 한 날짜를 훨씬 지나서야 어렵게 갚았다.

사람과 사람의 신뢰관계에서 ‘돈 관계’는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나는 A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 번 깨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그해 가을 그러니까 1993년 11월쯤 드디어 4년 동안 중단됐던 사범대 문예지를 펴낼 수가 있었다. 사범대 학우들이 그걸 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벅차다.


나는 ‘청사문학’을 펴내면서 교사의 꿈을 접었다. 야학교사 때부터 교직에 회의가 들었고 다른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좀 더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세상도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