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태자’ 김정남 말레이시아 공항 암살사건
북한은 김씨 일가가 지배하는 왕조국가다.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가 세습하고 있다.
김일성의 아들이자 김정은의 아버지였던 김씨 왕조의 2대 권력자 김정일은 생전 다섯 명의 부인을 뒀다. 장남인 김정남은 둘째 부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정일의 여인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출신의 넷째 부인 고용희다. 둘째 아들 김정철과 셋째 아들이자 3대 권력자인 김정은, 딸 김여정의 어머니다.
김정남은 한때 유력한 후계자였으나 후계 다툼 와중에서 이복동생인 김정은에게 밀려났다. 이때부터 해외를 떠돌며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2017년 2월6일 중국령 마카오에 체류 중이던 김정남은 말레이시아에 입국한다. 7일간의 일정을 마친 그는 2월13일 오전 9시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들어온다. 김정남은 공항 제2터미널 3층 자동발권기 앞에서 비행기 표를 사고 있었다.
이때 김정남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인도네시아인 여성 시티 아이샤(25)와 흰 옷을 입은 베트남인 여성 도안 티 흐엉(29)이 다가온다.

시티 아이샤가 먼저 김정남에게 말을 건네며 그의 얼굴에 로션 같은 액체를 바르고, 그 틈을 타 뒤에 있던 도안 티 흐엉이 다시 김정남의 얼굴에 액체를 문질렀다.
이후 김정남은 발권기 근처의 안내창구로 가서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공항 직원들은 그를 의무실로 데려갔다. 하지만 의무실로 가서는 걸음걸이가 흐트러지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공항 직원들은 김정남을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이송 도중 구급차에서 사망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피살자의 신원 확인에 나섰다. 당시 김정남이 소지하고 있던 여권 명의는 ‘1970년 6월10일생 김철’로 돼 있었다. 해외 도피 생활 중인 김정남이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 발생 2~3일 후에는 김정남을 습격한 두 여성도 체포된다. 이들은 경찰에서 “장난삼아 ‘몰래카메라 영상을 찍기 위해 크림을 발라야 한다’는 말에 돈을 받고 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두 여성의 행동이 주도면밀했다. 이들은 김정남을 공격한 뒤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가 손을 씻었다. 김정남 얼굴에 바른 로션이 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호텔방에 들어가 머리를 단발로 잘라 변장했다. 공항을 빠져나갈 때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주했다. 때문에 이들이 오랫동안 훈련받은 ‘청부 살인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불러왔다.
김정남을 살해한 물질은 화학무기로 이용되는 ‘신경작용제 VX’로 밝혀졌다.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이 바른 두 가지 액체는 각각 신경독 VX의 전구체로, 둘이 혼합되어 VX를 이루는 이원화 화학무기였던 것이다.
김정남의 소지품 중에는 대표적인 VX 해독제인 아트로핀 12정이 있었다. 그가 평소 독극물 암살에 대비했다는 의미다.
보통 VX에 노출되면 혈중 신경전달물질 분해 효소가 급감하면서 근육마비가 초래돼 사망한다. 김정남이 곧바로 아트로핀을 복용했다면 이런 작용을 늦춰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해독제를 쓰지 못했다.

범행 직후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인 리지현(35), 홍송학(36), 오종길(57), 리재남(59)은 말레이시아를 출국한 뒤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러시아 등을 경유해 유유히 평양으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또 다른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리정철(47)을 체포한다. 그가 두 여성(흐엉, 아이샤)을 수개월 전 처음 만나 선물과 여행 등으로 환심을 사면서, 인터넷에 올릴 재미있는 동영상을 찍으면 인터넷 스타가 될 수 있다고 포섭해 살인에 가담시켰다고 봤다.
그러나 검찰은 리정철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7년 3월3일 석방한 뒤 북한으로 추방했다. 이후 리씨가 북한의 명문 공과대학인 김책 공업종합대학교 ‘프로그람 공학과’에 1993년 입학해, 6년 뒤인 1999년 졸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리정철이 말레이시아에서 통일전선부의 중간간부급으로 활동하며 각종 사이버전을 수행했을 것으로 분석됐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도 경찰 고위 소식통들을 인용해 리정철이 북 정찰총국(RGB) 소속 요원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후 흐엉과 아이샤는 김정남 암살 사건에서 유일하게 신병이 확보된 피의자로 재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암살에 가담한 북한 용의자들이 모두 귀국하거나 추방되면서 이들의 혐의 입증에 한계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정부에서는 두 여성의 석방을 촉구하며 외교전을 펼쳤다.
결국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는 2019년 3월11일에 현지 검찰이 돌연 공소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풀려났다. 도안 티 흐엉에 대해서도 당초 적용했던 ‘살인’ 대신 ‘상해’로 혐의를 변경한 후 같은 해 5월3일 석방했다. 이로써 김정남 암살사건 가담자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사건 처리와 김정남의 시신인도를 둘러싸고 ‘단교’ 운운하며 신경전을 벌였으나 북한이 평양 주재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민간인 전원을 억류하는 ‘인질외교’를 벌이자 여기에 굴복한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김정남의 시신을 넘겨주겠다고 합의하고, 현지에서 화장한 후 북한으로 이송했고, 이후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써 김정남 암살사건은 겉으로는 배후도 없고 살인범도 없는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김정남 암살 공작’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배후는 북한이고, 그 정점에 김정은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가정보원은 북한 보위부, 외무성의 합작이라고 밝혔다. 암살 공작에는 외국인 여성 2명을 포함해 총 10명이 관여했다. 북한 출신 중 4명이 보위성 출신, 실제 독살에 나선 2명은 외무성 소속이라며 고려항공과 내각 직속 신광무역 소속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했다.
암살 실행은 2개의 암살조직과 지원조로 구성됐으며, 1조는 보위성 소속 리재남과 외무성 소속 리지현으로 구성돼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을 포섭했고, 2조는 보위성 소속 오종길과 외무성 소속 홍송학으로 구성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를 포섭했다고 국정원은 보고했다.
이들 2개 암살조는 별도로 활동하다가 말레이시아에서 합류해 암살을 감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원조는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파견된 보위성 주재관 현광성 등 4명으로 구성돼 암살조 구성과 김정남 동향 추적 등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암살 공작에 참여한 요원들은 북한으로 돌아간 뒤 모두 ‘공화국 영웅’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 말레이시아는 1973년 수교 후 가깝게 지내오다 김정남 암살 사건이후 악화된다. 양국은 서로 상대국 대사를 추방했고, 평양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관도 문을 닫으며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러다 2021년 3월 말레이시아가 대북재제를 위반한 북한 주민을 미국으로 송환하자 북한은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김정남의 비극은 그가 후계에서 밀려날 때부터 예견돼 왔다.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 권좌에 올라 지지기반이 불안했다. 사실상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도 김정은 보다는 김정남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여기에다 북한의 망명 정부 추진 움직임까지 일자 김정은에게 김정남은 눈엣가시였다.
일본 NHK 등은 김정남 암살 배경에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이중 하나는 2012년 장성택이 중국 방문 때 후진타오 주석과 베이징에서 별도 회담을 갖고 “김정일 위원장의 후임으로 김정남을 추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사실을 당시 저우융캉 정치국 상무위원이 도청한 뒤 이듬해 북한 최고지도자에 오른 김정은에게 밀고했다. 저우융캉은 2015년 부패 및 국가기밀유출죄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일각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국가기밀유출’이 ‘김정남 추대’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 인해 2013년 12월 장성택은 반역죄로 총살당한다. 이때부터 북한의 암살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뒷배였던 장성택이 숙청당하면서 김정남의 신변은 풍전등화였다.
여기에다 북한 망명정부까지 등장하면서 김정은은 더욱 조바심을 냈다. 자유조선(당시 천리마민방위)의 리더인 에이드리언 홍창과 김정남의 접촉설도 나왔다. 홍창이 김정남에게 접근해 수차례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했고, 이런 사실이 북한 정보 당국에 의해 김정은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만약 김정남이 망명정부의 수장으로 전면에 나서면 국제사회나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김정은이 김정남을 암살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일본 언론은 김정남이 한국 국정원과 미국 중앙정보국(CIA), 일본 정보기관 등에게서 돈을 받아왔다고 보도했다. 특히 국정원은 김정남에게 많은 돈을 주며 반정부 활동을 제안하는 등 김정은을 자극했다고 분석했다. 물론 김정남 암살 배경에 관한 내용 중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것은 없다.
한편 김정남 암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Assassins)이 2020년 12월 미국에서 개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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