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 ‘사도세자’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1735-1762)이다.
영조는 왕비 두 명과 후궁 4명을 뒀다. 왕비는 후사가 없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뒀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9세 때 병으로 죽었고, 영조가 42세 때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애지중지하며 이듬해에 왕세자로 책봉한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다. 8살 때인 1744년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 혜경궁 홍씨와 혼례를 올리고, 15살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정무에 관여했다.
그러나 점차 영조와 사도세자는 서로의 생각이 달라 갈등하기 시작한다. 왕은 글 읽기를 싫어하는 세자에게 실망을 느꼈고 공부보다 무예에 능한 세자의 기질을 못 마땅해 했다. 아버지의 혹독한 질책이 계속되면서 세자는 점점 아버지를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인 견해도 달랐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부자 사이도 더욱 멀어졌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으니 자진하라고 명하지만 세자가 따르지 않자 그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뒀다.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죽었고, 그의 나이 28세였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에 관한 이야기다. 사도세자의 또 다른 얼굴. 그는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였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실록은 조선시대의 임금이 왕위에 있는 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일과 그밖의 여러 사실들을 정리한 기록이다.
그나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당시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사도세자는 20세쯤 정신병이 발병한다.

1735년 4월28일(영조 31년)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뢰었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아주 심했다.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일종의 강박증이자 정신질환이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가 옷을 한번 입으려면 열벌이나 20~30벌은 준비해야 했다.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이 붙었다며 불태우기도 했다.
이런 증상은 세자가 영조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생긴 것이다.
22세 때부터는 정신질환이 심해지면서 폭행, 강간,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피해자는 주로 직접 시중을 들던 나인이나 내관이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입던 도중 심기가 뒤틀리면 그 자리에서 궁녀와 내시들을 때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 세자의 곁을 지키던 호위무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은 내수사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죽였다. 점치는 맹인은 점을 치다가 말을 잘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 하루에도 죽인 사람이 여럿일 때도 있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때는 짐승이라도 죽여야 화가 삭았다.
한중록에는 살인할 당시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그해(1757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화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라는 것을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을 여럿 죽였다.”

“경진년(1760) 이후엔 내관과 내인이 상한 일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두드러진 예는 내수사 차지 서경달이다. 소조(사도세자)께선 내사의 일을 느리게 한일로 서경달을 죽이고 출입내관도 여럿 상하게 하고 선희궁에 있는 내인 하나도 죽이셨다.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됐다.”
정조 임금 때 박종겸이 지은 <현고기>에도 사도세자의 살인기록이 자세히 나온다. 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수행한 평양사람 이신의 증언도 실려 있다.
“세자는 갑자기 화가 솟구치면 쇠채찍을 휘둘러 옆에 있던 사람을 빈번이 죽였는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1761년 1월 세자는 궁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이때 의대증이 발발하자 옷 시중을 들던 아끼는 후궁인 빙애(경빈 박씨)를 칼로 찔러 죽였다. 박씨에게는 돌 지난 아들 은전군이 있었는데, 이 은전군도 당시 사도세자의 칼에 맞고 우물에 던져졌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하원이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에는 “영조가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100여 명에 이르며 낙형(불로 달군 쇠로 지져 죽이는)이 참혹했다”고 적혀 있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도 2010년 쓴 <권력과 인간>에서 “사도세자가 죽인 무고한 사람이 100여 명 정도 된다”고 분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치를 하느라 동궁전의 창고가 텅 비어있었다. 세자는 번번이 미행을 나가 유흥을 즐기며 사치 향락에 빠지며 타락했다. 영조의 침방 나인을 강간해 임신시키고,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연쇄살인마에 망나니였던 셈이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은 비운의 세자라며 마냥 동정만 할 것은 아닌것이다. 그가 죽인 수많은 궁녀, 내관, 백성 등은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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