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여성들만 노린 ‘쾌락 연쇄살인마’ 강호순


2006년 9월부터 군포, 수원, 화성, 안양 등지에서 성인 여성이 잇따라 실종됐다. 이중에는 시신으로 발견된 여성도 있었다. 주민들에게 또 다시 ‘연쇄 살인’의 공포가 엄습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2월19일 군포시 대야미동에 거주하는 여대생 안아무개씨(21)가 행방불명된다.

연쇄 실종 8번째였다. 안씨는 이날 오전 11시쯤 집을 나선 뒤 연락이 끊겼다. 가족의 실종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안씨의 동선을 추적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오후 3시7분쯤 집에서 1km 떨어진 군포시 보건소였다. 언니 심부름을 위해 들렀다가 폐쇄회로(CC)TV에 모습이 잡혔다. 휴대전화는 오후 3시40분쯤 보건소에서 5km 떨어진 안산시 건건동 인근에서 꺼졌다.

이로부터 4시간 뒤 안씨의 신용카드가 무단으로 사용된다.

안산 성포동 농협 현금인출기 CCTV에 보통체격에 더벅머리 가발과 마스크를 착용한 남자가 안씨의 신용카드로 현금 70만원을 인출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경찰은 실종 다음날인 20일 경기경찰청 2부장(경무관)을 본부장으로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휴대전화가 꺼진 안산시 건건동에서 성포동 사이에 설치돼 있던 CCTV를 일일이 분석했다. 또 안씨의 최종 목격지점(군포 보건소)-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곳(안산 건건동)-신용카드 인출지점(안산 성포동)을 연결해 범행 시간대에 통과한 차량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대에 예상 이동경로를 통과한 차량은 7000여 대에 달했다. 이 중에서 동선이 같은 차량이 나온다면 유력한 용의차량으로 볼 수 있었다. 경찰이 CCTV를 분석하던 중 검은색 에쿠스 한 대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수사팀의 예상 동선과도 겹쳐있었다.

경찰은 차량 번호를 조회해 소유주를 파악했다. 차량 명의자는 김아무개씨(66·여)였다. 그녀는 경찰에서 사건 당일 차량을 운전한 것은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강호순(38)이다.


2009년 1월22일, 경찰은 안산에서 스포츠마사지사로 일하던 강씨를 찾아가 방문 조사를 벌였다. 그는 태연하게 경찰의 질문에 답변했지만 진술과 이동경로가 엇갈렸다.

경찰은 다음날 강호순이 소유하고 있던 차량과 집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강씨는 에쿠스 1대(어머니 명의), 무쏘 1대, 리베라 화물차 1대 등 총 3대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었다. 1월23일, 강호순의 차량 두 대가 불에 탄 채 발견된다. 범행차량인 에쿠스 외에도 무쏘까지 불에 탔다. 차량 방화는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경찰은 강씨를 찾아가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에 데려왔다.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해 집에 있던 컴퓨터 등도 압수해왔다. 강씨는 차량 화재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지만, 압수물 분석에서도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경찰의 첫 조사를 받은 후인 1월24일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포맷한 것이 확인됐다. 경찰이 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망을 좁혀가자 심리적 압박을 느껴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찰은 강씨의 진술과 동선이 맞지 않는 것을 집중 추궁했다. 태연한 척 심경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강호순. 그러나 버티는데 한계가 있었다. 강씨는 25일 새벽 “내가 했다”며 안씨 살해를 자백했다. 경찰은 강호순을 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사건 발생 37일 만이다.

안씨 살해 당시의 상황도 드러났다. 강씨는 실종 당일 오후 3시10분쯤 군포시 보건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안씨에게 접근했다. 그는 “집에 태워다 주겠다”며 말을 건넨 후 자신의 에쿠스 승용차 조수석에 태웠다. 이후 강씨는 보건소에서 약 800m 정도 떨어진 47번 국도변에 차를 세우고 성폭행을 시도했다.

안씨가 소리를 지르며 강렬하게 저항하자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제압한 후 손을 넥타이로 묶었다. 안산시 본오동 도금단지 옆 논두렁으로 이동한 후 신용카드를 빼앗고 번호를 알아냈다. 안씨의 가방을 뒤져 쓰지 않은 스타킹이 나오자 그걸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안씨의 시신에서 옷을 모두 벗겼다.

그녀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손톱에 DNA 등이 남아 있을 것을 우려해 열 손가락 손톱 부분을 가위로 잘라냈다. 안씨의 시신을 논두렁에 암매장한 후에는 옷과 소지품을 모두 태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안씨의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때에는 손가락에 콘돔을 껴서 지문이 남지 않도록 했다.

경찰은 강씨가 알려준 장소에서 시신을 발굴했다. 그가 말한 논두렁에서 약 2m 떨어진 논 옆 50cm 깊이에 알몸 상태로 묻혀 있었다. 실종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은 시신 옆에서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됐으며, 목걸이·팔찌 등 귀금속은 착용한 상태였다. 이것은 연쇄살인사건의 시작에 불과했다.

강호순이 가축을 키웠던 수원시 당수동 축사.

경찰은 2006년 12월부터 최근까지 실종된 부녀자들과의 연관성을 찾는데 주력했다. 강호순의 동선과 겹치는 부분이 없나 비교 분석했다. 그랬더니 실종 여성들의 휴대전화가 꺼진 장소인 화성시 비봉면에서 강씨가 2000년~2002년까지 거주한 것을 알아냈다.

또 강씨의 축사·거주지·생활반경 등이 연쇄실종사건 지역과 일치하는 점 등을 놓고 여죄를 추궁했다. 실종자 중 세 명의 여성이 안씨처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실종됐다는 것도 동일했다.

2006년 12월24일 수원 장안구 화서동 노래방도우미 박아무개씨(37)가 화성 비봉 근처에서 휴대전화 전원 꺼진 뒤 2007년 5월8일 안산 사사동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될 당시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있었고, 알몸 상태였다.


암매장 수법이 안씨와 비슷했다. 실종 여성들의 실종지역, 실종위치, 변사체로 발견된 여성의 살해수법과 암매장 방법 등이 모두 강호순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씨는 경찰의 여죄 추궁에도 “증거를 대라”며 오히려 큰 소리쳤다.

경찰은 감식반을 투입해 강씨의 리베로 차량을 압수수색했다.

차 안에서는 강씨의 점퍼가 나왔는데 사람의 체액이 묻어 있었다. 경찰은 점퍼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2008년 11월9일 실종된 주부 김아무개씨(48)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강씨는 결국 과학적 증거 앞에서 더 이상 발뺌하지 못하고 범행을 인정했다.

강씨의 연쇄 살인이 시작된 것은 2006년 12월1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군포시 산본동의 한 노래방에 손님으로 가장한 후 도우미로 일하던 배아무개씨(45)에게 접근했다. 그는 배씨를 자신의 무쏘 차량으로 유인했고,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 도로상에서 성관계를 갖고 살해했다. 배씨의 시신은 화성시 봉담명 비봉IC 부근 야산에서 발견됐다.

두 번째 살인은 10일 후에 벌어졌다. 범행 대상과 살해 수법도 첫 번째와 판박이였다. 강씨는 같은 해 12월24일 수원시 장안구 화서동에 있는 한 노래방에서 도우미 박아무개씨(37)를 만나 대부도에 가자고 유인해 살해한 후 안산시 사사동의 야산에 암매장했다.

두 번째 살인에 성공한 강씨의 살인 행각은 가속도가 붙었다.

2007년 1월3일에는 화성시 신남동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박아무개씨(52)가 희생양이었다. 강씨는 박씨를 자신의 무쏘 차량으로 유인한 후 첫 번째 희생자와 같은 장소인 화성 비봉 IC 주변에서 성폭행한 후 화성 삼화리 야산에 묻었다. 이번에도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 지 열흘 만이다.

불과 3일 후에도 살인은 이어졌다. 2007년 1월6일 안양시 안양동의 한 노래방에서 만난 중국동포 도우미 김아무개씨(37)를 리베라 화물차로 유인한 후 여관에서 성관계를 갖고는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에서 살해했다. 김씨를 목 졸라 살해하는 데 사용된 도구는 넥타이였다.

김씨의 시신이 암매장된 곳은 골프장이 들어서서 끝내 사체를 수습하지 못했다.

중국동포 김아무개씨를 암매장한 장소는 골프장으로 변해 있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인 1월7일에는 성당을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여대생을 노렸다.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버스정류장에 있던 연아무개씨(20)를 자신의 차량으로 유인해 수원시 호매실동 황구지천 부근에서 성폭행하고 살해해서 부근 하천에 암매장한 것이다.


강씨는 2008년에도 2건의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같은 해 11월9일 수원시 당수동 버스정류장에서 주부 김아무개씨(48)를 에쿠스로 유인해 수인선 도로 갓길에서 성폭행을 시도했으나 반항하자 곧바로 살해했다. 김씨의 시신은 안산시 성포동 소재 성포공원 야산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여대생 연아무개씨의 현장검증에 앞서 경찰에 암매장 장소에 마네킹을 갖다 놓았다.

연쇄 살인 마지막 피해자가 바로 군포에서 실종된 여대생 안씨다. 이 사건으로 강씨가 붙잡히면서 그의 연쇄살인은 끝이 나게 된다. 하지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7명의 부녀자를 살해했다고 자백했으나 그의 과거 행적 등을 보면 추가 범행 가능성이 다분했다.

강호순은 검찰로 송치된 후 여죄를 자백했다.

2006년 9월7일 오전 7시50분쯤, 강원도 정선에서 출근하던 정선군청 여직원 윤아무개씨(23)를 차량으로 납치했다. 강씨는 윤씨를 차량에 감금한 상태에서 10시간 동안 인근 지역을 돌아다녔다. 같은 날 오후 7시쯤 목 졸라 살해한 뒤에는 일명 ‘삼옥재’ 인근 절벽에 시신을 유기했다.

경찰은 강씨가 시신 유기장소로 지목한 영월군 영월읍 13호 군도 옆 절벽 아래 10~15m 지점에서 윤씨의 유골을 수습했다. 살해 일자로 보면 강호순 연쇄살인의 첫 희생자인 셈이다. 당시 그는 양봉업을 하며 강원도 정선과 태백 등지를 드나들었다.

강호순이 주부 김아무개씨를 승용차에 태운 수원시 당수동의 버스 정류장.

강호순은 자신의 살인행각에 대해 “2005년 10월30일 네 번째 부인이 화재로 숨진 이후 일 년여 동안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고, 여자들을 보면 살인충동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강씨의 넷째 부인과 장모의 죽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오히려 반대의 상황일 수도 있었다고 본 것이다.


강씨의 네 번째 부인은 장모와 함께 2005년 10월30일에 화재로 사망했다. 당시 강씨는 숨진 부인·장모와 한집에 있었으나 아들(12)과 함께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그는 “작은방에서 자다가 알루미늄 새시 방범창을 발로 차 이탈시킨 뒤 아들과 함께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강씨의 진술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우선 당시 화재가 발생한 집은 반지하 건물로 작은방 창문과 안방 창문이 바로 붙어 있었다. 큰소리로 “대피하라”고 외쳤어도 얼마든지 살아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강씨는 장모와 부인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유족들도 이런 강씨의 행동을 의심해 의문을 제기했고, 경찰에서도 조사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강씨는 또 네 번째 부인과 2002년부터 3년여 간 동거 상태에 있다가 화재가 발생하기 불과 5일 전에 혼인 신고를 했다.

부인이 화재로 숨지기 불과 1~2주 전에 부인을 보험대리점으로 데리고 가서 종합보험과 운전자상해보험에 추가로 2건이나 가입했다. 강씨는 부인이 화재로 사망한 후 4개 보험에서 총 4억8000만원을 수령했다.

강호순이 주부 김아무개씨를 살해해 암매장한 안산시 성포동 소재 인근 야산에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검찰 수사에서 ‘방화 살인’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씨는 방화가 아닌 실화로 오인될 수 있도록 화재 현장에 의도적으로 모기향을 피워 두고 경찰 조사과정에서 모기향에서 불이 번진 것처럼 거짓으로 진술했다. 화재 직후 경찰이 현장을 촬영한 사진과 사흘 뒤 국과수가 현장감식 당시 촬영한 사진을 대조한 결과에서도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방화에 사용한 유류를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스틱 용기가 없어졌던 것이다. 누군가 화재현장에 들어가 플라스틱 용기를 치웠다는 것이 된다. 검찰은 화재감식 전문가들과 법의학 교수 등이 참여한 관계자회의를 열어 화재 원인이 ‘유류와 같은 인화성 물질을 사용한 방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강호순이 발로 걷어차고 탈출했다고 했다가 공구를 사용해 잘랐다고 진술을 번복한 방범창의 나사가 온전한 상태였다는 사실도 유족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추가로 확인했다.

부인이 보험에 가입할 당시에는 휴대전화 요금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추가로 2개에 가입한 것도 의심스러운 정황이었다. 검찰은 이 같은 증거 등을 종합해 강씨가 보험금을 노리고 부인과 장모를 방화 살해한 것으로 보고 혐의를 추가했다. 이로써 강씨는 총 10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강씨를 살인, 강간, 현주건조물 방화치사, 존속살해죄 등으로 기소했다. 1심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강씨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도 강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유지했다. 강씨가 상고를 포기해 사형이 확정됐다.

그렇다고 강씨의 여죄가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강호순은 검거 이후에도 시종일관 여유를 보였다. 경찰이 증거를 제시했을 때에만 자신의 범행을 인정했다. 강씨의 범행주기(부인·장모 제외)를 보면 그가 최초 살인을 했던 날은 2006년 9월7일 강원도 정선군청 여직원이다.

두 번째 2006년 12월14일에서 2007년 1월7일까지 24일 사이에 5명을 잇따라 살해했다. 살해 주기도 1-2차(97일)-2·3차(24일)-3·4차(3일)-4·5차(1일)-5·6차(22개월)-6·7차(70일)이다.

유독 5차에서 6차 사이의 범행은 22개월이라는 공백기가 있다. 강호순의 범행주기와 살인충동으로 볼 때 이해 안 되는 기간이다. 충분히 다른 여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흉악 범죄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일었다. 2010년 4월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에 ‘8조 2항(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이 신설됐고, 심사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강호순은 지금까지 한 번도 피해자나 유족에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데, 큰 말썽 없이 수감생활을 한다고 전해진다. 그림이나 조각을 취미로 삼고 있고 실력이 상당하다고 알려졌다. 다른 재소자들과도 거침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강호순의 범죄 심리와 범행 패턴

강호순은 1970년 충남 서천의 시골 마을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역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뒤 부여에 있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부사관으로 군에 입대했으나 절도죄로 불명예 제대했다.
강씨의 아버지는 오토바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2006년에 사망했다. 그는 어머니 명의로 에쿠스를 구입해 본인이 타고 다녔다. 1992년부터 2005년 사이 네 번이나 결혼했고, 첫째 부인에게서 아들 둘,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연쇄 살인범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학대를 받은 경험이다. 유영철, 김대두, 정남규, 정두영 등이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적개심을 키웠다. 그 분노의 대상이 부유층이나 여성이었다.
강호순의 경우는 달랐다. 가정환경이 불우하지 않았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학대나 폭력을 경험하지도 않았다. 강씨는 사회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재산과 직업까지 있었다.

그의 살인의 목적은 오로지 ‘쾌락’이었다. 1차 목적은 살인, 2차 목적은 성관계였다. 모르는 여성을 마치 낚시 하듯 차에 태워 성폭행하고 살인하기까지의 과정을 즐겼던 것이다. 이걸 충족시키기 위해 같은 범행을 반복했다.
강호순은 여성 편력이 심했다. 그는 검거 직전까지 네 명의 부인과 살았다. 1998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했고, 2003년 네 번째 부인을 만날 때까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결혼기간은 점점 짧아졌다. 첫째 부인(5년4개월), 둘째 부인(6개월), 셋째 부인(2개월), 넷째 부인은 혼인신고 후 5일 만에 사망했다. 그는 결혼 생활 중에는 수시로 총각 행세를 하며 다른 여성을 만났다. 직업도 마사지사였다.
강씨는 여성에 대한 살인충동이 일어나면 무조건 차를 끌고 나갔다. 노래방이나 한적한 버스정류장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이때 외모나 연령, 직업 등은 가리지 않았다. 눈에 띄는 여성, 차에 타는 여성이 희생자가 됐다. 피해자들의 연령이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범행에 이용된 차량은 성폭행과 살인에 유리하도록 개조했다. 여성이 차에 오르면 운전석 옆 보조석에 앉히고 한적한 곳에 다다르면 성관계를 제안했다. 여기에 동의하면 성관계를 갖고 피해자가 벗어 놓은 스타킹으로 목 졸라 살해했다. 성관계를 거부하면 주먹과 발로 때려 제압해 넥타이로 손발을 묶었다. 그런 다음 성폭행하거나 심하게 반항할 경우 곧바로 목 졸라 살해했다.
범행 수법은 매우 잔인하고 주도면밀했다. 시신의 열 손가락을 가위로 잘라 반항할 때 흔적이 남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시신은 야산, 천변, 논두렁 등에 매장했다. 땅에 묻기 전에는 옷을 모두 벗겨 알몸 상태로 만든 후 옷과 소지품을 태워 증거를 없앴다. 납치·살해된 7명의 경우 유인(노래방·버스정류장)→성관계·성폭행→살해-암매장·증거인멸 등이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범죄로 부자되고 범죄로 망했다

그의 재산 밑천은 보험금이었다. 1999년부터 해지된 것을 포함한 보험 계약 건수가 30여 건에 이르렀다. 8건의 보험에서 6억6000만원의 보험금을 타냈다. 장모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4억8000만원을 받았고, 트럭 화재와 점포 화재, 차량 도난 등으로 1억80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으로 안산시 본오동에 있는 5층 건물 4층에 시가 5억원 상당의 상가건물을 구입했다. 안산시 팔곡동 빌라의 임차보증금 7000여만원, 수원시 당수동 축사 임차보증금 5000여만원, 여기에다 은행 예금 2억8000여만원을 포함하면 9억원이다. 상가의 대출 담보액을 제하면 7억5000만원 정도가 남는다.
보험금을 밑천삼아 많은 재산을 불린 것이다. 안산에서 마사지사로 일하며 한 달에 약 150만원 정도의 수입도 올렸다. 재력가 행세를 위해 에쿠스를 타고 다니며 ‘강호축산 대표’, ‘강호양봉 대표’로 된 명함을 갖고 다녔다. 검거 당시 지갑 속에 현금과 수표 등 총 450여만 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위에 쌓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2009년 2월 강호순에게 살해된 피해자 6명의 유족 21명은 13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같은 해 4월16일 수원지법 안산지원 민사1부(재판장 소진영 부장판사)는 “강호순은 11억여원을 유족들에게 지급하라”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이 소송에서 패소함에 따라 강호순은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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