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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수록’ 그룹 부활 김재기 사망사건


1993년 8월 11일 새벽, 서울 홍제동 고가도로 위로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한민국 록의 자존심 ‘부활’의 재기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한 청년이 그곳에서 멈춰 섰다.

단 한 번의 연습 녹음(데모)만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전무후무한 보컬리스트, 고(故) 김재기의 짧고도 강렬했던 생애는 그렇게 비극적인 신화가 되었다.

운명적 만남, “불광동에 죽이는 보컬이 있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에게 90년대 초반은 암흑기였다. 이승철의 탈퇴와 해체, 그리고 연이은 개인적 시련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그에게 초등학교 동창 장동명 목사가 전화를 걸었다. “불광동에 죽이는 보컬이 하나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반신반의하며 찾은 교회 예배당. 그곳에서 김재기가 부른 나자레스(Nazareth)의 ‘Love Hurts’는 김태원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예배당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압도적인 성량과 그 안에 깃든 서글픈 허스키 보이스. 김태원은 직감했다. 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찾던 ‘부활의 목소리’이자 음악적 페르소나라는 것을.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김재기의 군 입대와 김태원의 구속(대마초 사건)이 엇갈리며 팀 결성은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김태원은 포기하지 않았고, 1992년 출소 후 곧장 김재기를 부활의 3대 보컬로 영입하며 3집 앨범 <기억상실>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단 한 번의 녹음, 그리고 3만 4천 원의 비극

1993년 8월 11일, 앨범 작업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김재기는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의 데모 버전을 가이드 삼아 단 한 번 녹음했다. 완벽한 본 녹음을 앞둔 어느 날, 그는 전날 불법주차로 견인된 자신의 차를 찾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당시 그에게 부족했던 돈은 고작 3만 4000천 원. 그는 김태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태원 역시 당장 그 돈을 마련해 줄 처지가 못 됐다.

결국 스스로 돈을 마련해 견인소에서 차를 찾아 나오던 새벽 2시쯤, 홍제동 고가도로 인근에서 마주오던 차량이 빗길에 미끄러져 중앙선을 침범하며 김재기의 차를 덮쳤다. 향년 25세. 본 녹음 마이크 앞에 제대로 서보지도 못한 채 맞이한 허망한 작별이었다.

김태원은 무너졌다. 하지만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순 없었다. 그는 김재기의 목소리가 담긴 유일한 흔적인 ‘데모 테이프’를 정교하게 다듬어 1993년 12월, 유작 앨범 <기억상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김재기가 완창할 ‘사랑할수록’과 ‘소나기’, 그리고 앞부분만 녹음되어 김태원의 코러스로 완성된 ‘흑백영화’ 등이 담겼다. 특히 ‘소나기’는 본래 황순원 소설을 테마로 했으나, 김태원이 떠난 김재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가사를 수정해 발표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입소문을 탄 앨범은 발매 10개월 만에 KBS <가요톱10> 1위를 차지했고,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세계 음악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데모 녹음만으로 만든 밀리언셀러’의 탄생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고인이 된 김재기가 벼랑 끝의 부활을 화려하게 ‘재기’시킨 셈이다.

바람으로 떠난 이, 전설로 남다

김태원은 그 후 3년 동안 김재기를 추모하며 촛불을 끄지 않았고, 일기장에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고 적으며 통곡했다.

김재기의 빈자리는 그의 친동생 김재희(본명 김재두)가 채웠다. 형과 꼭 닮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1994년 방송 활동 당시 형의 영정 사진을 들고 무대에 올라 ‘사랑할수록’을 불러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김재희는 이후 4집 <집념에 관하여>를 통해 ‘슬픈 사슴’ 등의 명곡을 남겼으나, 형의 거대한 그림자를 견디지 못하고 팀을 떠나 현재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 중이다

대중의 기억 속 김재기는 영원히 ‘미완의 완성’으로 남은 전설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비 오는 밤이면 많은 이들이 견인비가 없어 새벽길을 서둘렀던 청년 보컬의 애절한 음색을 떠올린다.


현재 그의 영정은 서울 정릉 극락사에 안치되어 있다. 비록 그가 떠났지만, 그가 남긴 단 한 번의 숨결은 ‘사랑할수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부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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