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 박봉선 등 ‘전주교도소 3인조’ 탈옥사건
전북 전주시 평화동 전주교도소 기결수 감방 1사하 25호실에는 무기수 박봉선(30), 신광재(21‧징역 15년), 소년범 김천수(17) 등 기결수 3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중 박봉선은 지난 1983년 5월,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의 한 뒷산에서 처남댁인 윤아무개씨(29)의 꼬임으로 아내가 가출했다며 윤씨를 유인해 살해한 뒤 시체를 유기해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신광재는 1989년 5월, 새벽 3시쯤 광주시 동구 대림동 오아무개씨(여‧25) 집에 침입, 금품을 훔치려다 들키자 오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소년범 김천수는 전북 정읍시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뒤 기물을 부수는 등 폭력을 휘둘러 징역 장기 10월, 단기 8월형을 받았다.
1990년 12월27일 새벽, 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오전 1시 교도관이 근무교대를 한 후 새벽 4시30분쯤, 감시가 소홀해지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포를 베게로 받쳐 잠자고 있는 것처럼 꾸며 놓은 후 감방 안의 화장실 쪽 1.5m 높이에 있는 채광용 창살 2개를 쇠톱으로 끊자 약 30cm의 틈새가 벌어졌다.
이들은 한 달 전부터 창살을 조금씩 쇠톱으로 잘라 놓았기 때문에 창살 두 개는 손쉽게 끊을 수 있었다. 이어 사물함으로 쓰던 2.7m 나무 선반을 뜯어내 사다리로 만들었다. 감방을 빠져나온 후에는 사다리를 이용해 1감방과 2감방 사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장을 넘는데 성공했다.
탈주범들은 전주대 방향으로 3km쯤 달아나다 지다가던 택시를 잡아탔다. 전주인터체인지 방향으로 이동하다 전주시 외곽에서 내려 1시간쯤 걸은 뒤 아침 8시쯤 완주군 삼례읍에 도착했다.

박봉선은 삼례시장에서 10만원 권 수표 1장과 현금 1만원을 주고 점퍼 등 옷가지와 빵모자 2개, 장갑 2개를 산 뒤 옷을 갈아입었다. 인근 철물점에서 4500원을 주고 식칼 3개를 사서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박씨는 공중전화로 삼례시장 근처에 산다는 30대 남자를 나오게 한 뒤 인근 지하다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양념통닭집에서 맥주 2병을 먹고 나왔다.
탈주범들은 낮 12시쯤, 버스로 이리시내(현 익산시)에 도착해 여관에서 5시간30분 정도 잠을 잤다. 오후 6시쯤 여관에서 나와 카바레와 술집 등으로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
신광재가 신문에 난 탈주 기사를 보고는 “수배됐으니 대전으로 도망가자”고 제의했다. 이들은 오후 8시5분쯤 이리시 마동 목욕탕 앞길에서 택시에 올랐다. 박과 신은 형사를 가장, 김군의 손에 수갑을 채운 뒤 택시기사 최아무개씨(28)에게 “경찰인데 범인을 잡으러가니 완주군 봉동읍까지 가자”고 했다.
이들은 택시가 익산 춘포면에 이르자 최씨에게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해 현금 3만7000원과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을 뺏은 뒤 최씨를 뒷좌석에 태우고 박봉선이 택시를 몰았다.
박은 봉동읍 부근에 이르렀을 때 택시를 세우고 최씨를 야산으로 끌고 가 “죽이자”고 했으나 신과 김이 “민간인은 죽이지 말자”고 말려 다시 최씨를 택시에 태워 대전방면으로 향했다.
이들은 익산 금마 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대전으로 가던 중 “교도소안에서 담배 장사를 해 돈을 많이 벌었다”며 최씨에게 10만원짜리 수표 몇 장을 꺼내보이기도 했다. 밤 10시10분쯤 서대전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택시와 최씨를 버리고 달아났다.
탈주범들은 밤 11시쯤 중동 사창가 여인숙에서 윤락녀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28일 오전 6시10분쯤, 이들은 기차를 타고 상경하기 위해 대전역으로 가다 자신들을 추적하던 전주교도소 교도관들에게 발각되자 철길을 타고 동구 삼성동쪽으로 달아났다.

오전 7시10분쯤, 용전동 동부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식당으로 들어가다 대전 동부경찰서 형사 두 명이 검문하자 이중 김아무개 순경(28)을 흉기로 위협, 차고 있던 실탄 6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을 빼앗았다. 흉기로 김순경의 목을 찔러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탈주범들은 터미널 부근을 돌아다니다 오전 8시5분쯤 봉전동 여관 앞에서 시동을 걸고 있던 봉고차를 발견하고, 운전자(29)를 협박, 차량을 탈취해 달아났다.
오전 8시20분쯤, 대덕구 석봉동 임시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자 경찰관을 밀치고 계속 차를 몰아 신탄진쪽으로 차를 몰았다.
탈주범들은 오전 8시45분쯤 신탄진에 도착, 신탄진고교 옆 상수원 취수탑 부근에 봉고차를 버린 뒤 경찰이 추적하자 권총 1발을 쏘고, 500미터쯤 떨어진 야산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20분쯤, 대덕구 삼정동 신흥사 밑 민가에 숨어 있다 대청호 선착장에 매어져 있던 고기잡이 2인승 목선을 타고 80여m 떨어진 상류 무인섬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공수부대 소속 고무보트를 빌려 타고 뒤쫓아가 20여m 거리를 두고 대치, 자수를 권유했다.
박은 권총을 겨누며 “먹을 것을 보내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는데 경찰이 “한 명을 보내주면 갈전으로 함께나가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김군을 보냈다. 경찰은 김군을 곧바로 고무보트에 태워 연행했다.
이때 경찰 지원병력 10여명이 고무보트 2대에 분승, 호안으로 건너갔고, 경찰헬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잇달아 방송했다. 낮12시20분쯤, 검거조가 권총을 겨누며 낮은 포복으로 접근해갔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박봉선이 쪼그린 자세에서 머리에 권총 1발을 발사해 자살했다. 신광재도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 선 자세에서 왼쪽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때 경찰도 신을 향해 동시에 3발을 발사했다. 신광재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탈주극은 탈옥 약 31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주범 박봉선과 신광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번 사건은 교도소, 경찰의 추적 공조체제와 검문검색이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여실히 드러냈다. 먼저 이들의 탈옥사실은 약 3시간이 지난 당일 오전 7시20분쯤 교도관들의 아침점호 때 드러났다.
검찰은 부랴부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교도소와 경찰은 역과 터미널 등의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탈주범들의 연고지 등에 수사대를 급파했다. 아울러 경찰은 전국 경찰서에 비상근무령을 내리고 주택가 순찰을 강화했다.
하지만 탈주범들은 대전으로 잠입할 때까지 검문검색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사이 이들은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시장에서 옷을 사고, 식칼을 구입했으며, 심지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사창가에서 성매매까지 했다.
28일 아침 대전역 구내에서 전주교도소 직원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약 26시간 동안 경찰의 비상망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붙잡힌 김군을 통해 탈주동기와 도주경로 등을 조사했다. 그는 “교도소를 탈옥해 달아나는 동안 죽은 박광재·신광재가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해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탈주범들은 탈옥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 드러났다. 먼저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감방 안에서 오랫동안 담배 장사를 했다.
박봉선은 교도관과 짜고 면회 온 가족이나 친지에게 부탁해 50만원을 교도관의 온라인 통장에 입금시키면 이 교도관은 솔담배 50갑을 사다 박에게 건네줬다. 박은 동료 재소자들에게 개비당 5~6000원씩 주고 팔았다. 이런 수법으로 도피자금 55만원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탈옥 준비 과정과 교도관의 공모나 방조 등은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를 일단락 했다.
탈주범들이 도주 중 사용한 수갑도 박봉선이 교도소 안 화장실에 숨겨뒀다가 탈옥할 때 가지고 나온 것은 확인했으나 구입경위 등 정확한 출처는 밝혀내지 못했다.
감방에서 발견된 담배, 시계, 운동화가 어떻게 반입됐는지 여부와 탈옥에 사용한 쇠톱의 출처도 규명되지 않았다.
또 자살한 박씨와 신씨의 오른쪽 허벅지에 새겨진 장미문신과 ‘잊지 못할 형 박봉선 90.5.6’ ‘잊지 못할 아우 신광재 90.5.6’ 등의 문신이 날짜로 보아 수감 중인 5월에 새겨졌음이 확실한데도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은근슬쩍 넘어갔다.
때문에 이들의 탈옥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최대 의문이었던 지름 2cm나 되는 쇠창살을 어떻게 절단했느냐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절단을 위해서는 최소 20여 일 이상이 걸리는데 수시로 감방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 중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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