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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후 돌연사한 ‘공포의 삼겹살’ 개그맨 김형곤

그는 풍자 개그의 대부이자 개그계의 ‘영원한 회장님’이었다.

1960년 5월30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서울 중경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79학번)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80년 ‘제2회 TBC 개그콘테스트’에 장두석과 함께 은상에 입상하면서 대학생 개그맨 시대를 열었다. 대상은 이성미‧김은우 콤비가, 동상은 조정현이 받았다.

당시 개그맨이 되는 길은 모두 콘테스트 형식이었다.

1982년 KBS 2TV <젊음의 행진>에서 요리연구가 이종임씨의 말투를 흉내 낸 ‘워낙 비싸요’ 등의 유행어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개그맨으로 떠오른 것은 풍자 개그를 하면서다.

1980년대 암울했던 시절 KBS <유머 1번지>, <유머극장>, <한바탕 웃음으로> 등에서 ‘회장님, 회장님, 우리회장님’ ‘꽁자 가라사대’ 등 시사 풍자코미디를 선보였다.

당시에는 주로 몸을 이용해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대부분이었으나 김형곤은 ‘시사 풍자 개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정치적 사건이나 비리, 부정부패 등을 그만의 특유한 해학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풍자해 단순한 웃음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특히 1987년 당시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던 <유머 1번지>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에서 다양한 정치‧사회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극중 비룡그룹 회장 역을 맡은 김형곤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아부하는 임원들의 행태를 통해 5‧6공 교체기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부패한 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학래와 엄용수는 손바닥을 비비며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에밀레(종)입니다. 뎅~” 하며 충성 경쟁을 벌인다. 이때 양종철이 “밥 먹고 합시다”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 김형곤은 “으이그, 저게 처남만 아니었어도 짤라버리는 건데”라는 멘트를 날린다.

이것은 당시 전두환 정권과 권위주의 사회의 부패와 전횡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턱을 치는 장면은 당시 제2권력자였던 이순자씨에 대한 풍자였다.

그의 멘트였던 “잘 돼야 할텐데” “잘 될 턱이 있나”와 그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임원들의 “조오씁니다”는 남녀노소 모두가 따라하는 유행어였다. 이 코너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후 ‘꽃피는 봄이 오면’ ‘봉숭아 학당’ ‘탱자가라사대’ 등 많은 코너에서 풍자와 해학으로 통쾌한 웃음을 전했다.

하지만, 거침없는 시사 풍자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미움을 받아, 중간에 프로그램이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형곤은 <김형곤쇼> 등 토크쇼 형식의 시사 풍자 개그를 구축하는데도 앞장섰다. 코미디 전용 레스토랑인 ‘코미디클럽’을 운영하면서 대중과 더욱 가깝게 소통했다. 1989년에는 극단 ‘곤이랑’을 창단하며 연극으로 무대를 넓혔다.

노태우 정권 때는 소극장에서 전‧현직 대통령들의 방귀 뀌는 스타일을 풍자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대통령과 부하들이 회의를 하는데 방귀를 뀌면 어떻게 할까라는 조크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당당하게 “괜찮아, 임자도 뀌어”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뀌면 부하들이 “각하, 제가 뀌었다고 하겠습니다”라면서 자기가 전두환 대신 덮어쓰는 모습으로 풍자했다.

이에 반해 당시 현직인 노태우 대통령이 뀌면 괜히 자기가 뀌어놓고서 부하한테 “네가 뀌었제?” 하니까 부하들이 “제가 각하 방귀 대신 뀌어줍니까?”라면서 맞먹는다는 내용이다. ‘물태우’라고까지 불린 노태우의 유약한 리더쉽을 풍자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김형곤은 서슬퍼런 안기부에 끌려가 “각하 방귀뀌는 걸 네가 봤냐?”라며 곤혹을 치렀다. 그는 뒷날 공연에서 “내가 대통령 방귀 뀌는 걸 꼭 봐야 개그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게 어디 대한민국 안기부가 나설 일인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때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었다.

1998년 6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입당하면서 잠시 방송을 떠났다. 1999년에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특별보좌역을 거쳐 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을 맡았다.

하지만 2000년에 실시된 자민련 성동구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당을 탈당했다.

그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성동구에서 출마했으나 새천년민주당의 임종석 후보, 한나라당의 이세기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하면서 현실 정치의 벽을 실감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물러나면서 “개그 잘 배워갑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로 인한 후유증은 상당했다.

그동안 모았던 재산 대부분을 잃었으며 부인과는 이혼했다. 당시 14세이던 붕어빵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보내는 등 남들을 웃기던 그는 정치도전 실패 이후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김형곤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방송대신 대학로 공연에 매진했다.

극단 ‘곤이랑’을 통해 연극 <등신과 머저리> 등을 만들었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병사와 수녀>, <왕과 나>, <회장님 좋습니다>, <신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용이 나리샤> 등 코미디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했다.

이중 ‘병사와 수녀’는 1995년부터 약 2년간 1천회 이상 공연된 작품이다. 한국전쟁 통에 인천의 어느 작은 무인도에 병사와 수녀가 표류해오면서 생기는 일을 그리는 폭소 코미디다.

김형곤은 웃음 전도사를 자처했다.

1998년부터 스탠딩 코미디 ‘엔돌핀코드’를 공연해왔고, 2005년에는 웃음 철학을 담은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컴퓨터도 다룰 줄 모르는 그였기에 책은 A4 용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내친 김에 같은 이름의 ㈜엔돌핀코드도 설립했다. 그의 포부는 웃음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웃음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공연 수익금으로 소아암 어린이 돕기 등 불우이웃 지원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형곤은 상복도 많았다.

1987년에 KBS코미디 대상과 백상예술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후 백상예술대상은 두 차례(1996‧1998년) 더 거머쥐는 영광을 안았다. 1997년에는 제11회 예총예술문화상 연예부문 공로상을 받았다.

김형곤은 2000년대 들어 건강 다이어트를 하며 체중 감량에 나선다. 매일 헬스클럽에 나가는 등 꾸준한 운동과 식단 조절을 통해 30kg 가까이 감량하는데 성공한다.

대한민국 대표 뚱보였던 김형곤의 살빼기는 다이어트 광고를 찍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체중 감량 후에는 다이어트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2006년 3월11일 오전 9시쯤, 김형곤은 평소처럼 자택인근인 서울 성동구 자양동의 한 헬스클럽을 찾았다.

이상한 것은 이날은 평소 운동습관과 반대로 움직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러닝머신 등 헬스로 땀을 뺀 뒤 사우나로 가던 평소 습관과는 달리 들어오자마자 사우나로 땀을 뺀 다음 헬스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자 헬스트레이너가 화장실에 갔다가 문틈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119에 신고했다.

구급대가 도착했을 당시 김형곤은 한손에 신문을 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화장실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출혈이 심했다고 한다.

인근 병원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사인은 돌연사로 판명났는데, 스트레스 등 복합적 원인에 의한 것으로 판단됐다. 향년 46세.

김형곤은 죽기 전 국내 개그맨 최초로 미국 카네기 홀 공연을 앞두고 있던 터라 아쉬움은 더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대한민국 풍자개그와 시사개그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다. 좀더 살아있었다면 개그의 품격은 한층 높아졌을 것인데 안타깝다.

김형곤은 또 40~50대가 즐길 수 있는 코미디를 펼쳐 보이겠다고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물거품이 됐다. 시신은 생전에 서약한 고인의 뜻에 따라 가톨릭의대에 연구용으로 기증됐다.

유해는 경기도 고양시 청아공원에 안장됐다. 이곳에는 생전 절친이던 개그맨 양종철이 있는 곳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부적인 개그맨 김형곤은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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