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총탄 맞은 ‘이토 히로부미 피 묻은 셔츠’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만주 하얼빈 역의 플랫폼에 기차 한 대가 들어오자 수많은 러시아 군인이 기차 주위를 에워쌌다.
기차에서 긴 수염을 흩날리며 이토 히로부미가 내렸고, 의장대의 팡파레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천지를 뒤흔드는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환영 인파로 가득 찬 플랫폼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귀빈 4명이 차례로 쓰러졌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군중 속에서 만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선 청년 안중근이었다. 그는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후 권총을 내던지고 품 안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그리고 ‘코리아 뷰레’(대한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날 안중근은 총 7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그중 3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작렬했고, 나머지 3발은 이토의 수행원들의 몸에 명중했다. 조선 병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최후를 맞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곳은 일본 야마구치 현의 하기시다.
여기서는 지난 2009년 9월 이토 사망 100주년을 기념해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열었다. 이때 그동안 미공개 됐던 역사적 자료들이 처음 공개됐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 총탄을 맞고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와이셔츠’와 조선통감 시절에 착용했던 모자와 견장 그리고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송병준·조중응과 이토가 조선 강탈에 의기투합하고 공동으로 쓴 서화 등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피 묻은 와이셔츠’는 100년 전의 절박했던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당시 이토가 입었던 흰색 와이셔츠는 사각형 나무 상자에 보관되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끔찍하다. 오른쪽 부분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 때 흘린 많은 피가 혈흔 그대로 묻어 있었다.
얼룩진 피와 치료를 위해 가위로 절단한 흔적이 겹쳐져 한쪽은 완전 누더기가 돼 있었다. 가슴 부분에는 총알구멍이 선명하다. 와이셔츠를 보관한 나무 상자의 뚜껑에는 당시 이토의 수행원인 무로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토는 총에 맞은 뒤 응급 치료를 받았고, 브랜디를 두 잔 마셨다. 한국인이 가해자라는 말을 듣고 ‘빠가야로’(바보 같은 녀석)라고 읊조리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저격 후 30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이 말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거짓말일 것이다. 이토는 흉부와 복부 등에 세 방의 총알이 박혔다. 이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다면 브랜디 두 잔을 들이키고, 말할 여력이 남아 있었을 리 없다”며 “이토는 아마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브랜디를 마시며 ‘빠가야로’라고 읊조렸다는 말은 이토의 영웅스러움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비하를 위해 후대에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피 묻은 셔츠 옆에는 그가 조선통감 시절에 착용했던 모자와 견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토는 모든 공식적인 자리에 이 모자와 견장을 착용하고 나왔다. 이 모자와 견장을 한 이토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을사오적으로 지칭되는 대표적인 매국노다.
구한말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조중응 역시 매국 7역신의 한 사람이다. 조중응은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찬성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이들 매국노 3명과 이토 히로부미가 각각 한 구절씩 의미심장한 휘호를 남긴 서화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정신일도’(精神一到), 이완용 ‘산하무성’(山河無聲), 송병준 ‘천재명야’(天載命也), 조중응 ‘묵불어’(默不語)라고 적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사살한 후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가,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됐고 이듬해 3월26일 사형됐다.
안 의사는 “국권이 회복되는 날 나를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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