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연재

‘바보’처럼 살아온 기자의 길

전북 익산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섬마을 국어선생님을 꿈꾸고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야학교사를 하면서 능동적인 삶을 원해 진로를 수정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언론계에 투신, 물류 전문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중앙일보> 자매지를 거쳐 시사저널에 입사했다.

<시사저널>에서 사회부 기자, 사회팀장, 사회전문기자, 탐사보도팀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군 의문사, 연쇄살인 등 각종 강력사건 현장을 누벼 ‘수사반장’으로 불렸다.

기자생활 중 대부분을 크고 작은 사건들과 함께했고 많은 사건 현장을 취재했다. 단순히 취재하는데 머물지 않고 약자 편에서서 악의 무리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였다.

잘못된 국책건설사업으로 생존권을 잃을 뻔했던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기자직’을 걸고 정부 당국과 싸웠다. 2년 동안 엉터리 국책사업의 실체를 지속적으로 파헤쳐 대통령이 ‘완전백지화, 전면재검토’를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 이미 결정된 국책건설사업이 완전히 뒤집힌 최초의 사례다. 약 5000명 주민들의 삶의 터전도 지켜줬다.

주민들은 나를 위해 마을 잔치를 벌이고 “생존권을 되찾아줘서 고맙다”며 감사패를 줬다. 충청북도는 “올곧은 취재로 도민들의 숙원을 풀었다”며 도민을 대표해 이원종 도지사가 감사패를 수여했다.

또 조폭이 낀 거대 사기조직과 3년 간 전쟁을 벌였다. 거의 매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렸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66개의 사기조직, 사기두목과 조직원 253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이들의 실체를 계속해서 폭로해 수많은 피해자를 구제했다.

죄형 법정주의를 어긴 죄목으로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이 사건으로 언론계에서 ‘바보기자’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제5회 민주시민언론상을 수상했다.

일제강점기 명월관 기생(일명 명월이)의 생식기와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머리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최초 폭로했다.

뒤이어 시민단체 등이 소송을 진행했고, 법원은 70년 만에 화장하도록 결정했다.

필자 등은 조선의 여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그녀의 실물 초상화를 찾아냈고, 실명이 ‘홍련’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아울러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천도재를 지냈고, 필자가 상주가 됐다.

백백교 교주의 머리는 서울 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에서 화장됐으며 이때도 필자가 상주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렇게 필자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 교주와 일제 강점기 피해자인 조선 여인 명월이의 상주가 됐다.

오원춘 토막 살인사건 때는 현장에서 소각로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제사건과 함께 군 사건에도 관심을 갖고,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 육군 제28사단에서 발생한 ‘530GP 사건’을 유족들과 함께 10년 넘게 추적했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공로가 매우 크다며 그 마음을 감사패에 담아서 줬다.

실종자와 해외 입양인 가족 찾기에도 적극 나서 다수의 실종자를 찾는 데 기여하고, 해외 입양인의 가족을 42년 만에 찾아주기도 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2회 실종아동의 날에 ‘경찰청장 감사장’을 받았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제도권 언론에 비전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시사저널에서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객원기자로 활동했다.

홀로서기를 시작해 ‘사건 블로그’를 운영했고 하루 평균 10만명의 방문자를 기록했다. 2023년 1월 국내 최초로 사건 전문 뉴스 사이트인 <정락인의 사건추적>을 개설했다. 일일 방문자 10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처럼 나는 기자생활 내내 사건과 함께 했고, 지금도 사건과 접착제 처럼 붙어 있다. 저서로는 국내 미제사건을 추적한 <미치도록 잡고싶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