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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만 184명, 연쇄성폭행범 ‘대전 발바리’ 이중구 사건

연쇄 성폭행범을 흔히 ‘발바리’라고 일컫는다. 범행 후 발 빠르게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졌다.

1998년부터 대전지역을 시작으로 성폭행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수법과 범인의 인상착의 등으로 볼 때 동일인으로 추정됐다.

경찰이 추적에 나섰으나 쉽게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워낙 신출귀몰한데다 날렵하게 경찰을 따돌렸다. 경찰과 언론에서는 그를 ‘대전 발바리’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발바리’의 시초가 됐다. 그의 범행은 한 여성 승객과의 시비가 발단이 된다.

1998년 2월 어느 날 새벽, 대전 시내에서 한 20대 여성이 택시에 승차한다. 술에 취해있던 여성은 ‘택시기사가 길도 잘 모르느냐’ 등의 말로 핀잔을 주기 시작한다.

얼마 후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요금이 많이 나왔다며 택시비를 훽 던지고 나가자 택시기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그는 비틀거리는 여성의 뒤를 따라 주택가 원룸에 있는 집을 알아둔다.

며칠 후 이른 아침, 택시기사는 보복을 결심하고 서구 월평동에 있는 여성의 집에 나타나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자 “보일러 수리공”이라고 속여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요금 시비를 벌였던 여성과 동거인 등 여성 두 명이 있었다. 택시기사는 두 사람을 흉기로 위협해 결박한 후 잇따라 성폭행한다.

얼마 전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여성이 “살려달라”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자 택시기사는 자기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희열이 느껴졌다. 범인은 개인택시를 몰던 키 157cm, 왜소한 체격의 ‘이중구’였다.

범행 이후 이씨는 경찰의 추적을 우려했으나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첫 범행이 성공하자 이씨는 쉽게 두 번째 범행에 나서게 된다. 이번에도 심야시간대 술에 취해 귀가하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를 꺼려한다고 판단되자 연이어 범행에 나섰고, “나는 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처음에는 주로 홀로사는 유흥업소 종업원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 점점 대담해졌고, 범행대상도 가정주부, 회사원, 여대생, 미성년자 등을 가리지 않았다.

이씨는 새벽운동을 하는 척하며 범행장소를 물색한 뒤 가스 배관을 타고 화장실 창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주로 침입과 도주가 용이한 2층과 3층을 노렸다. 침입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가스 검침원이나 우유 배달원, 보일러 수리공으로 행세하며 피해자들 집에 들어갔다. 어떤 때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 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노렸다.

가족과 함께 사는 부녀자도 범행의 대상이 됐다. 한 번 성폭행한 여성을 3개월 만에 다시 찾아가 성폭행했으며, 피해자의 부탁으로 돈을 갖고 현장에 나타난 다른 여성까지 성폭행했다.

피해 여성의 남자친구를 묶어놓고, 그 앞에서 성폭행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적도 있다. 한 여성을 성폭행한 후 친구를 부르게 하고, 또 그 피해자의 친구를 부르게 하는 식이었다.

2000년에는 여성 4명이 함께 사는 집에 침입해 결박한 후 이중 1명을 성폭행한 후 3명을 강제추행했다. 2001년에는 여성 7명이 함께사는 집에 들어가 3명을 성폭행하고, 나머지 4명은 성추행했다. 성범죄 후에는 금품을 갈취했다.

이중구는 2003년 7월부터는 대전을 포함해 청주와 구미, 전주, 용인 등 전국으로 범행 지역을 넓혀갔다. 경찰 추적을 따돌리고 혼선을 주기 위한 꼼수였다. 이씨는 범행 당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피해자들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전을 시작으로 연쇄 성폭행사건이 벌어지자 민심은 흉흉해졌다. 경찰은 범행현장에서 용의자의 정액과 체액을 채취해 유전자 감식을 벌였고, 수십 건의 성폭행 사건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용의자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했다.

이중구도 꼬리를 잡히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였다. 범행 후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피해 여성을 목욕시키고, 신고를 막기 위해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감추는 등 지능적인 범행을 이어갔다.

피해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변태적인 성행위를 시켰는데, 수치심 때문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씨의 계획대로 일부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렸고, 경찰 수사도 그만큼 어려웠다. 그는 또 피해자들은 강간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성행위를 원한다고 애원하라” 등의 말을 하도록 시켰다.

성폭행 피해자는 늘어가는데 사건해결이 안 되자 성난 여론은 경찰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연일 이 사건을 주요 내용으로 보도했다.

더욱 초조해진 경찰은 2000년도 이후 발생한 성폭행 사건 전부를 분석하며 용의자를 압축해나갔다. 피해자들의 공통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는 ‘왜소한 체격에 키가 작다’고 판단했다.

이중구의 범행수법 중 특이한 것은 피해자들을 결박하는 도구는 직접 챙겨가지 않고, 침입 후 집안에 있던 수건을 가위로 잘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2004년 1월4일 광주사건과 2005년 6월17일 논산사건을 분석하면서 유력한 단서를 포착한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두 사건의 현장 인근에 같은 차량이 주차돼 있었던 것이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차량의 번호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경찰은 차량 번호판 조회를 통해 명의자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까지도 경찰은 이중구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때마침 밖에 맨발로 나와있던 이씨는 경찰을 보자 “양말을 신고 나오겠다”며 집안으로 들아간 뒤 창문을 통해 도주했다.

경찰은 그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유전자를 대조했더니 정확히 일치했다. 최초 사건 발생 약 8년만인 2006년 1월10일 경찰은 이중구를 대전지역 등에서 발생한 연쇄 성폭행사건 피의자로 특정한다.

경찰은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검거에 나섰지만, 이씨의 도주 행각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논산 처가집으로 향했다가 청주를 거쳐 서울로 이동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이에 맞선 경찰은 이씨의 사진과 인상착의 등을 넣은 수배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1월18일 경찰은 이중구가 서울에서 대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낸다. 곧바로 형사들을 서울로 보내 그가 지인의 아이디를 도용해 인터넷 게임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경찰은 인터넷 접속기록을 통해 강동구 천호동의 한 PC방에서 접속된 사실을 파악하고, 1월19일 오후 4시30분쯤 해당 PC방에서 이중구를 검거하는데 성공한다. 이때까지 이중구는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었고, 경찰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시 그는 흰색 야구모자와 푸른색 마스크를 쓰고 상의는 밤색 무스탕, 하의는 군청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흰색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씨는 더 이상의 저항의지를 포기하고 순순히 수갑을 찼다.

경찰 수사결과 이중구는 1998년 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7년8개월에 걸쳐 전국을 다니면서 강간과 강도, 절도 행각을 벌여왔다. DNA 검사로 확인된 것만 77건 중 대전에서만 49건이었다. 수사과정에서 30건이 추가로 드러났으며 피해자만 무려 184명으로 파악됐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강간범으로 기록되는 순간이다.

이중구도 자신이 몇 차례 범죄를 저질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이 DNA 감식으로 확인된 피해자의 숫자를 언급하자 “내가 그렇게 많은 성폭행을 했나요”라며 놀랐을 정도다.

강간, 강도, 절도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이씨에게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피해자를 127명만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가 성폭력과 강도 범죄를 저질렀지만 살인을 하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중상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씨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고, 양측 모두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량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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