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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태진아-현대건설 사장 부인’ 간통사건 전말


1970년대 초반,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신인상을 거머쥐며 스타덤에 올랐던 가수 태진아(본명 조방헌). 하지만 그의 화려한 비상은 단 2년 만에 멈춰 섰다.

1975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현대건설 사장 부인과의 간통 사건’ 때문이다. 당시 21세였던 청년 가수와 47세 재벌가 안주인의 부적절한 만남은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의 시작은 197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촌의 한 맥주홀에서 노래하던 태진아는 당시 현대건설 조성근 사장의 아내 김보환씨 일행을 처음 만났다. 이때 김씨 일행이 술을 마시면서 태진아를 자리에 부른다.

석 달 뒤 인천의 한 호텔에서 첫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은 이후 여관과 모텔, 호텔을 전전하며 1주일 혹은 10일에 한 번꼴로 밀회를 즐겼다.

이들의 위험한 관계는 1975년 1월 26일, 응암동의 한 여관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아내의 행적을 의심해 형사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친 남편 조 사장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두 사람은 경찰 조사를 받은 후 검찰로 송치된다. 검찰청사에 불려나왔을 당시 김씨는 초록색 치마에 밤색 털코트를 입고 하이힐 구두를 신은 평소 차림 그대로였다.

조사 과정에서 태진아는 김씨로부터 매번 약 50만 원씩, 총 600여 만원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80kg) 가격이 500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한 번 만남에 쌀 100가마니에 달하는 거액을 받은 셈이다.

태진아는 이 돈의 사용처에 대해 “100만원은 옷을 해 입고, 나머지 500여 만원은 레코드 취입과 방송국 PD들의 접대에 썼다”고 밝히며 “세상 물정을 몰라 부끄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태진아가 심문을 받는 동안 김보환은 수갑과 포승을 한 채 검찰청 대기실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눈을 감고 벽을 향해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태진아의 심문이 끝난 후 검사실로 들어가는 순간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자 “아이고 무서워”하면서 온몸을 떨기도 했다. 김씨는 조사에서 남편과는 성격이 맞지 않아 2년전부터 영등포구 등촌동 집의 1층과 2층에서 침실을 따로 써왔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김씨는 이혼을 당했고, 태진아는 구속되었다가 조 사장의 고소 취하로 풀려났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했다. 연예협회 제명과 방송 출연 금지 조치가 내려지며 그는 한국을 떠나 미국 유랑 길에 올라야 했다.

세월이 흘러 이 사건은 이른바 ‘태진아 나비효과’라는 이름으로 다시 회자된다. 조 사장이 사건 직후 물러나면서 당시 부사장이던 이명박이 사장으로 승진한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인터넷에는 태진아의 간통 사건 덕분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됐다는 ‘태진아 나비효과’라는 글이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사건은 1975년 발생했으나 이 전 대통령의 사장 취임은 2년 뒤인 1977년이기 때문이다. 만약 조 사장이 부인의 간통사건이 문제가 됐다면 곧바로 물러나야 했지만 2년이나 더 사장 자리르 유지했다. 이것을 문책인사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사건의 여파로 김씨의 딸이 투신했다는 루머 역시 사실이 아니다. 김보환은 조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조씨는 2014년 6월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부고 명단에 자녀들이 모두 기재된 것으로 보아 근거 없는 낭설임이 확인됐다.

한때의 잘못된 선택은 당사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를 남겼지만, 그를 둘러싼 음모론들은 상당 부분 과장된 것으로 풀이된다.

38가지 직업 전전한 흙수저에서 ‘트로트 사대천왕’까지
태진아는 누구인가

가수 태진아의 인생은 극적인 역전극의 연속이다. 1953년 충북 보은의 빈농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조차 싸가지 못할 만큼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14살에 무작정 상경한 그는 중국집 배달,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무려 38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72년 일식집에서 노래를 부르다 작곡가 서승일에게 발탁된 그는 태현실의 ‘태’, 남진의 ‘진’, 나훈아의 ‘아’를 딴 예명을 얻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간통 사건으로 인한 10여 년의 공백과 미국 이민 생활 끝에 1989년 ‘옥경이’로 재기에 성공, 이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명실상부한 트로트 거물로 우뚝 섰다. 이후 대한가수협회장을 역임하고 후배 양성에 힘쓰며 가요계의 대부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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