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연재

아버지가 새긴 ‘십자가 문신’으로 42년 만에 가족찾은 해외입양인

서울 중구 흥인동에 사는 윤태훈씨(51)의 왼쪽 팔에는 특이한 문신이 있다. 큰 십자가 아래 점이 네 개 찍혀 있는 모양이다.

경기도 동두천시에 사는 동생 기태씨(49)의 왼쪽 팔에도 똑 같은 문신이 있다. 아버지 윤권중씨(작고)가 새긴 것이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윤씨는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었다. 아내와 일찍 헤어진 후 전북 전주시 중화산동 친가에서 부모와 살며 아이들을 키웠다. 기와 찍는 기술자였던 윤씨는 28세 때 척추 수술을 받은 후 거동이 불편해졌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자식들을 키울 형편이 안 됐다. 오랜 고심 끝에 아이 셋을 보육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윤씨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상황에 놓이자 각자의 몸에 가족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을 새겼다. 훗날 떨어져 살더라도 이 표식으로 형제들을 찾으라는 의미였다. 윤씨는 큰 아들 태훈(8), 둘째 아들 기태(6), 막내 딸 현경(2)의 왼쪽 팔에 똑같은 문신을 새겼다.

기독교 신자였던 윤씨는 십자가를 크게 새기고 그 아래 가족의 숫자(아버지, 아들 둘, 딸) 만큼 점 4개를 찍었다. 장남 태훈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우물가에서 나와 동생 둘의 팔에 문신을 새겼다. 보육원에 보내기 전 마음먹고 새긴 것”이라고 말했다.

1975년 3월 윤씨는 전주보육원을 찾아 아이 셋을 맡겼다. 그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잘 돼서 너희들을 꼭 찾으러 오겠다”며 눈물을 머금었다. 딸 현경은 당시 2살이었다.

아버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현경이는 너무 어려 보육원에서 키울 수 없게 됐고, 해외 입양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1976년 1월7일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그렇게 현경이는 가족들과 떨어져 태평양을 건넜다.

국내에 있는 윤현경씨 가족.

태훈씨와 동생 기태씨는 전주보육원에서 6년 동안 생활했다. 전주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 윤치경씨는 “조카들이 보육원에 들어간 뒤에도 어머니가 자주 들러 손주들을 챙겼다”고 말했다.

1981년 형제는 전주보육원을 나와 조부모‧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태훈씨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할머니가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82년 쯤 아버지 윤씨는 아들 둘을 데리고 전주를 떠나 경기도 동두천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기와 찍어내는 일을 했다. 그는 해외로 입양 보낸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아들 형제에게 “너희들이 잘 돼서 언젠가는 현경이를 꼭 찾아라”고 신신 당부했다.

2000년쯤 윤씨는 6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태훈씨는 “아버지의 시신은 화장해서 동두천에 모셨다. 이곳에는 할머니의 산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 뒤 태훈씨와 동생은 각자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다. 동생 기태씨는 동두천에서, 형 태훈씨는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태훈씨 형제는 어머니를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졌고,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교류도 없었다.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라고 한다.

아버지가 왼쪽 팔에 새긴 문신이 형제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문신은 ‘흉측하고 불량스러움’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로 인해 형제는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폭행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태훈씨 형제는 미국으로 입양 간 동생을 잊은 적이 없다. “잘 돼서 꼭 찾아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항상 가슴속에 담고 살았다. 하지만 사는 게 팍팍하고 형편이 어렵다보니 동생을 찾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오랫동안 (사)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 회장 나주봉)’, 미혼모협회 I’m MOM(대표 김은희)과 함께 ‘해외입양인 가족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8년 3월5일 미국입양인 윤현경씨는 중앙입양원(현 아동권리보장원) 홈페이지 ‘친가족찾기’에 자신의 인적사항과 사진을 등록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현경씨는 자신의 생년월일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부모나 형제들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었다. 보육원에서 촬영했던 사진과 왼팔에 새겨진 문신이 유일한 표식이었다.

필자가 윤현경씨 가족을 찾기 위해 만든 전단지.

필자는 기사에 들어갈 메인 이미지에 현경씨의 어릴적 사진과 문신을 강조해서 크게 넣었다. 가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가 가족을 찾는 단서는 사실상 문신이 유일했다. 이어 현경씨의 사연을 담은 기사를 페이스북 등 SNS에 공유했다.

그랬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현경씨의 오빠가 자신의 친구라는 제보자가 나타났다. 친구의 왼팔에도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제보자는 전주에 사는 김승현씨였고, 김씨의 친구가 바로 ‘윤태훈씨’였던 것이다.

김씨는 통화에서 “기사에 난 사진을 보고 친구 동생이란 것을 단 번에 알아봤다”고 확신했다.

이어 “나는 태훈이와 이웃집에서 살았다. 중학교 다닐 때 팔에 있던 문신이 하도 특이해서 ‘이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가슴 아픈 사연을 얘기해 줬다”며 “그때 어린 마음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친구 동생을 찾아주겠다고 마음먹고 해외입양인들이 가족 찾는 것이 있으면 유심히 봤다”고 말했다.

김승현씨는 친구 태훈씨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려줬다. “태훈아, 미국으로 입양 간 현경이 찾았다”고 전했다. 태훈씨는 깜짝 놀랐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승현씨가 링크해 준 동생 관련 사진과 내용을 보고 “내 동생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서야 동생이 가족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태훈씨는 아버지가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42년 전 아버지가 “형제들을 찾을 때 표식으로 사용하라”고 한 그 문신 때문에 동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미국에 있는 윤현경씨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 따져봤다. 가장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러 근거와 정황이 거의 일치했다. 3남매의 왼쪽 팔에 새겨진 독특한 문신은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보증수표라고 볼 수 있었다.

윤현경씨 오빠 왼쪽 팔에 있는 문신(왼쪽). 현경씨는 입양 후 양부모가 문신을 지웠으나 가족을 찾으려고 펜으로 다시 그렸다(오른쪽).

또 태어난 지역, 입양 당시 상황, 나이, 이름 등이 정확히 일치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에 입양된 윤현경씨라는 것을 확신했다.

태훈씨는 “동생을 이렇게 찾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며 “그동안 동생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 나쁜 가정에 입양됐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좋은 양부모 만나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서 너무 고맙고 기쁘다”고 말했다.

전미찾모 사무실에서 나주봉 회장, 윤태훈씨(가운데), 필자가 시사저널에 나온 기사를 보고 있다.
전미찾모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동생을 찾은 윤태훈씨를 축하해주고 있다.

작은아버지 윤치경씨도 “힘들게 살줄 알았더니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부모가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가정형편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입양을 보내게 된 것”이라며 “고모 두 분이 아직 생존해 있다”고 전했다.

필자가 전북 익산 금마에서 제보자인 김승현씨(왼쪽)를 만나고 있다.
필자가 전북 익산 금마에서 현경씨 작은아버지 윤치경씨(왼쪽)와 제보자 김승현씨(오른쪽 첫번째)를 만나고 있다. 윤치경씨와 김승현씨의 고향은 전주, 필자의 고향은 익산이다.

윤현경씨 가족의 사연은 <시사저널> 2018년 7월3일자에 자세히 보도됐다. 기사는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필자가 썼다. 참고로 필자는 시사저널에서 약 10년 정도 근무하면서 많은 사건 현장을 취재했고, 퇴사 후 사건 전문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으로 입양 간 윤현경씨는 어떻게 살았을까.

미국 이름은 ‘사라 존스’다. 두 명의 입양된 자매와 함께 자랐다.

현경씨는 대학에서 엔지니어링과 법학을 전공했다. 10년 이상 변호사로 활동했고, 테크놀로지 관련 기업가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인과 결혼해서 아들 형제를 낳았고, 현재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살고 있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친부모를 찾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위해 중앙입양원 홈페이지에 ‘가족찾기’ 등록을 했던 것이다.

필자는 윤현경씨에게 가족으로부터 입수한 사진(아버지, 오빠들 팔에 있는 문신, 가족 등)을 SNS 메시지로 보내주고, 상봉식을 준비했다.

서울 청량리역 근처에 있는 전미찾모 사무실.

그해 10월14일 윤현경씨 가족이 상봉식을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 필자와 전미찾모 나주봉 회장은 상봉식 장소를 ‘전미찾모 사무실’로 정했다. 이곳은 비록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이지만 수많은 실종자와 그 가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가족이 실종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하다.

나주봉 회장은 그동안 800명이 넘는 실종자들을 찾아 준 우리나라 실종의 산증인이다. 해외입양인 중에는 실종자들도 적지 않다. 이곳에서의 상봉식은 수많은 실종자와 해외입양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는 상징성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윤현경씨 외에 남편 매튜(44), 큰 아들 데리우스(14), 막내 아들 벤저민(12)이 참석했고, 국내에서는 작은 아버지, 두 명의 오빠, 조카 등 가족들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필자가 기획하고 추진하고 진행했다. 상봉식은 기쁨의 눈물과 무한한 감동으로 뒤엉켰다. 가족들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전미찾모 사무실에서 열린 가족 상봉식 장면.

이날 행사에는 실종자 가족인 송혜희양 아버지, 김하늘군 어머니, 이훈식군 어머니 등도 참석했다. 아울러 상봉식에 도착한 ‘축하의 쌀’은 윤현경씨 가족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 윤현경씨 가족은 부모와 가족들이 살던 동두천과 고향인 전주를 찾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현경씨는 내게 가족을 찾아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와 이를 기념하는 액자를 만들어 보내왔다.

윤현경씨 가족의 기적같은 만남은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현경씨의 가족을 찾고자 했던 의지,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주겠다는 제보자 김승현씨의 따뜻한 마음, 이들 가족을 찾아주려고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만든 결실이다.

나는 실종 아동을 찾고 해외입양인 가족찾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2회 실종아동의 날’에 경찰청장 감사장을 받았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수많은 해외입양인들과 실종자 가족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현재 윤현경씨 가족은 미국과 서울에서 수시로 연락하며 그동안 못다한 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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