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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봉 ‘대대장 일가족’ 도끼 살인사건

상병 고재봉(27)은 육군 1109야전공병단 101대대 소속이었다.

부대는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 있었다. 고씨는 지난 1962년 12월29일 301대대 박병희 중령(36) 관사에 침입해 명태와 구두 두 켤레(군화와 신사구두)를 훔쳤다.

박 중령은 식모한테 이런 사실을 듣고는 “오랜만에 외출해 술도 마시고 싶고 하니 명태마리나 훔쳐 간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출근하려는데 군화와 구두까지 훔쳐간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해 박 중령은 출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고재봉이 윗집에 사는 초등학교 교사 집에서 옷가지 등을 훔친 사실까지 드러나자 박 중령은 화가 났다. 그는 부관을 시켜 신남지서에 도난신고를 했다.

부관이 순경 1명과 어론리 마을로 들어올 때 보따리를 손에 든 고재봉과 마주쳤다. 순경은 고씨를 제지해 길가에 세워두고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박 중령을 만나러 갔다. 그 사이에 고재봉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얼마 후 군 수사기관에 검거된 고재봉은 10CID(범죄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박 중령은 잃어버린 물건 확인을 위해 CID에 갔는데, 고재봉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박 중령은 “야, 이놈아, 군인이 무슨 짓이냐. 네가 명절을 앞두고 오랜만에 외출을 나와 술이라도 먹고 싶었을 줄 안다. 나한테 찾아왔으면 술이라도 줬을텐데, 네 대대장(101대대, 박 중령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함)의 체면을 보더라도 그런 짓을 해서 되느냐”고 호통쳤다. 심문하던 조사관에게는 “민간인 물자까지 훔쳐갔으니 잘 조사해서 처리하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과 이 사건을 정리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는 고재봉이 박 중령의 ‘당번병’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고재봉과 박 중령은 대대가 달랐다. 1963년 11월18일자 <경향신문>에 나온 박 중령 인터뷰를 보면 그는 고재봉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또 박 중령은 301병기대대 대대장이었고, 고재봉은 101대대 소속이었다.

이 일로 고재봉은 절도죄로 구속돼 육군교도소에서 6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출소 후 부대에서 탈영했다. 1963년 9월 초 서울로 잠입해 국도극장 앞에서 애인 최기숙(20)을 만났다. 그녀는 고재봉을 전과자라고 냉대했고, 헤어지자며 결별을 선언했다. 고씨는 애인에게 버림받자 이를 비관하며 “모든 것이 박 중령 때문”이라고 느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고씨는 박 중령을 죽이기 위해 10월10일 강원도 인제로 갔다. 그가 살던 집(관사) 근처를 살피기 시작한다. 대대장용 지프가 그 집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박 중령이 아직도 관사에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 중령은 다른 곳으로 전출가고 그 집에는 이득주 중령이 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고재봉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사이 주변 절골산 등지에서 강냉이 등으로 연명하며 숨어서 노숙했다. 범행 1주일 전 어론리 유 아무개씨 집에서 도끼 한 자루를 훔치고, 동명 신풍리 민가에서 다시 식도 한 자루를 챙겼다. 이 흉기를 관사 뒷산 낙엽 속에 감추고 10월12일부터 1주일간 매일 밤 이 중령 집에 들어가 문고리까지 잡았다가 차마 결행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18일 오후에는 살해를 결행하고자 마을의 탈곡작업장에서 술을 얻어마셨다. 술기운에 용기를 낸 고재봉은 밤 10시쯤 흉기를 들고 하산해 이 중령 관사로 갔다. 울타리 밖에 숨어서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이 중령이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구토하고, 부부간에 언쟁을 하고 방에서 잠든 것을 알았다. 19일 새벽 1시30분쯤 관사 뒷문으로 침입, 방문을 열고 만년필형 전지로 대대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식도를 허리에 찬 채 두 손으로 도끼를 쥐고 이 중령의 머리를 내리쳐 즉사시켰다.

고재봉은 방안의 불을 켰다. 주전자에 술이 있어 그것을 마셨다. 자기가 포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권총이 필요할 것 같았다. 대대장의 서랍을 뒤지며 권총을 찾는데 옆방에서 자고 있던 이 중령의 부인 김재옥씨(교사)가 깼다.

그녀는 남편이 자고 있는 방으로 오며 “여보, 무엇을 해요”라고 물었다. 고씨는 방에 들어온 김씨를 도끼로 쳐서 살해하고, 비명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놀라 깨어 울자 아랫방으로 가서 장녀(9), 차녀(5), 막내아들(3), 식모(15) 등 차례로 모조리 죽였다.

고재봉은 이렇게 이득주 중령 집에 있던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이 중령의 자녀 중 유일한 생존자는 서울 큰 집에 있던 큰 아들 이훈군(12) 뿐이었다. 고재봉은 일가족을 몰살시킨 후 이 중령의 손목에서 시계(BOMA) 1개, 아내 김씨의 시신에서 백금 다이아 반지 1개를 강탈했다.

또 이 중령의 군복을 뒤져 10원을 꺼낸 후 야전잠바, 작업복 바지, 근무복 상하, 군화 한 켤레를 꺼내 나왔다. 방 안에는 현금 등 귀중품이 든 외국산 캐비넷이 있었다. 고씨는 이것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너무 단단해 결국 실패했다. 고재봉은 이때까지도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박 중령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고재봉은 범행 후 현장에서 40m쯤 떨어진 어론교 아래에서 이 중령의 옷과 구두 한 켤레를 묻어두고 도보로 홍천군 두면 산중까지 들어갔다. 그곳에서 범행 당시 입었던 피에 젖은 작업복 바지와 이 중령의 신분증을 땅에 묻었다.

고씨는 19일 새벽 3시30분쯤 홍천군 서석면 흥암리에서 모 사단 소속 김아무개 병장 등 2명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받았다. 이들은 고재봉이 갖고 있던 시계와 다이아반지, 현금 580원을 탈취하고 그대로 놔 줬다. 고씨는 홍천까지 걸어가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오전 8시쯤 버스로 횡성을 거쳐 오후 4시쯤 서울 마장동에 있는 사촌형 집에 도착했다. 고씨는 이곳에서 3일간 묵고 있다가 23일 오후 7시30분쯤 집을 나가 금호동의 또 다른 사촌형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때 신문을 보고서야 자신이 죽인 것이 박 중령이 아니라 이 중령인 것을 알았다. 고씨는 이튿날 낮 12시쯤 집에서 나와 금호동 사촌 매형 집에 잠깐 들렀다가 오후 1시쯤 마장동의 사촌형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죽인 사람이 이 중령인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25일 사건 현장인 인제로 갔다. 그곳에서 박 중령이 6사단으로 전출된 것을 확인했다. 고씨는 산중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 26일 오후 7시50분쯤 서울로 돌아와 마장동 사촌형 집에 잠깐 들른 다음 박 중령을 죽이기 위해 동대문시장에서 60원 주고 과도 3개를 구입했다.

군경합동수사대는 사건 발생 1주일만인 25일 고재봉을 진범으로 단정하고 그를 사진과 함께 전국에 긴급 지명수배했다. 육군 헌병감실과 제1군에서 고씨의 체포에 현상금 3만원을 걸었다.

고재봉은 신출귀몰했다. 군경의 추적을 피해 버스, 도보 등으로 시흥, 안양, 수원을 거쳐 평택시 송탄면 서정리에 이르렀다. 27일에는 온종일 산속에 숨어 있었다. 어둑할 무렵 서정리 비행장 부근 모래밭에서 토굴을 파고 붙잡힐 때까지 16일간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 토굴은 인근 민가에서 불과 670m 밖에 되지 않았다. 고씨는 낮에는 그곳에서 나와 들판을 헤매었고, 밥은 이웃 민가에서 훔쳐다가 먹었다.

11월6일에는 민가에서 자전거 1대를 훔쳤다. 자신이 갖고 있던 흉기를 전부 챙긴 다음 자전거를 타고 6일 후 서울로 다시 들어왔다. 고씨는 돈이 다 떨어졌다. 박 중령이 있는 철원 6사단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비가 필요했다. 종로5가에서 행상을 하는 외사촌 동생 김용구씨(20)가 생각났다. 그는 김씨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대신 행상을 하는 김복수씨(20)를 만나 말을 주고 받았는데 이때 꼬리가 잡혔다.

리어카에 군밤과 땅콩을 파는 김복수씨는 이날도 종로5가 버스 정류장 근체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오후 6시쯤 됐을 때 국방색 잠바에 밤색 작업복 바지를 입고 노란 등산모를 눌러 쓴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누구를 찾는 눈치더니 곧 김씨를 알아보고 “고종 사촌 용구를 만날 수 있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김씨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지명수배 중인 고재봉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김씨는 고씨의 고종사촌과 창산동에서 한집에 기거하고 있었고, 고재봉이 약 1개월 전 용구씨를 찾아왔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고재봉을 안다는 이유로 동대문경찰서에 가서 조사받은 일도 있었다.

김씨는 “용구씨가 늘 리어카를 맡겨두는 종로5가 리어카 보관소에 가 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고재봉은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장사하던 물건도 팽개치고 고재봉의 뒤를 밟았다. 고씨가 김씨의 리어카 보관소에 들렀다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리어카 보관소 직원에게 112신고를 부탁했다. 그러나 신고가 되지 않았다.

고재봉은 청계천변을 따라 가더니 리어카로 양말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전거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신문 한 부를 사서 자신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 읽었다.

김씨는 7~8명의 장사꾼들에게 다가가 “저놈이 고재봉이니 함께 붙들자”고 했으나 모두 꽁무니를 뺐다. 김씨는 할 수 없이 양말 행상을 하는 김성씨(26)에게 다시 112신고를 부탁하고 청계천 복개로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고씨의 뒤를 따라갔다.

오후 6시20분쯤 김성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청계천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김복수씨는 고재봉을 추격하다 동대문시장 남문 입구쪽에서 길 건너편에 있던 서울시경 경비과 소속 사이드카를 발견하고, 고재봉을 신고했다. 사이드카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던 고씨의 앞길을 막은 후 그를 체포했다.

사건발생 25일 만이다. 체포당시 과도 등 칼 3개와 자귀(목재를 찍어서 깎고 가공하는 연장) 1개도 압수했다. 수중에는 단돈 1원과 먹다 남은 빵조각 그리고 고구마 한 개가 있었다. 이로써 신출귀몰하던 고재봉의 도주행각도 끝이 났다.

고재봉을 검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 땅콩장수 김복수씨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언론은 앞다퉈 김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하며 그의 용기를 칭찬했다. 고재봉을 추격한 김복수씨와 신고한 김성씨는 표창장과 현상금을 받고 2박3일간의 관광여행 선물도 받았다.

고재봉은 CID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단독 범행이었다”며 “잡히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순순히 그날의 범행을 자백했다. 12월12일 육군보통군법회의는 고재봉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그는 푸른 수의를 입고 가슴에는 죄수번호 ‘5000번’을 달고 있었다. 강도살인‧상관살해‧예비강도 등 8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자리에서 재판장은 고씨에게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내세우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씨는 “별다른 유리한 증거를 내세우지도 않겠으며 죄의 대가를 달게 받겠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강도 살인이 아니고 살인 강도다”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도가 주목적이 아니고 살인이 주목적이었다는 뜻이다.

고재봉은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재판정에서 이 중령을 도끼로 내려치는 순간을 진술할 때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의 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때 방송 카메라를 고씨에게 들이대자 벌떡 일어나서 “이 새끼 죽고 싶으냐. 나는 기왕에 죽을 몸이지만 내 친척들까지 괴롭히지 말라. 내가 도망할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고 죄의 대가를 받기 위해 앉아 있을 뿐이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12월19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는 구형대로 고재봉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을 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너무도 태연했다.

고씨는 항소를 포기했고, 이듬해인 1964년 3월10일 인천 부평 근교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죽기 전에 기독교에 귀의해 매일 수기를 쓰며 참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을 몰살한 죄는 무엇으로도 용서될 수가 없다.

한편, 이득주 중령 부인 김재옥씨는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전쟁 초기 동락리 전투에서 열세였던 국군에게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주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소위였던 이 중령과 여기서 연이 닿아 결혼까지 했다.

이득주 중령과 박병희 중령은 육사 동기생이다. 육군본부 병기감실 등에서 오랫동안 같이 근무한 절친한 사이였다. 이 중령의 유해가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때는 서울까지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 중령은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군 생활을 오래하지 못하고 예편했다고 한다.

고재봉은 누구인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서 출생했다. 유치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상경해 빵장사와 빙과 행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961년 10월27일 군에 입대(군번 10922106)해 1109야전공병단 101대대에 자대배치를 받았다. 당시 본적과 주소를 속이고 사기 입대했다. 301병기 대대장인 박병희 중령 집에서 물건을 훔친 혐의로 6개월간 혹독한 수감생활을 했다. 그 후 탈영해 이득주 중령 일가족을 살해했다.
고재봉은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키 165cm에 얼굴은 둥글고 주근깨가 많이 나 있었다. 작은 눈에 스포츠형, 전라도 말씨를 사용했으나 여자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담배를 좋아하며 소주, 4,5홉 가량을 거뜬히 마실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당시 군 수사기관은 “고재봉은 10대부터 줄곧 외따로 떨어져서 혼자 굴러다니며 살아왔다. 그는 전과자라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사랑하는 이도 그를 죄인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6명을 죽일 수 있는 잔인성은 이런 동기에서 움텄는지도 모른다”는 언론 브리핑을 했다. 언론에서는 고재봉을 ‘살인귀(殺人鬼)’라 표현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점

1.단독범행이 의심된다.
고재봉은 군 수사기관에서 범행은 혼자했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그러나 단독범행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삽시간에 6명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하기까지 혼자 힘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현장검증에서 피살자들은 모두 머리를 도끼로 얻어맞아 죽은 것이 확인됐다. 수법이 똑 같은 점으로 볼 때 살인범은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 6명을 죽인 살인범의 몸은 피로 젖었고, 손은 피투성이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재봉의 손이 닿은 곳에는 피가 묻어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고씨는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물건도 훔쳤다. 이 중령과 부인 김씨의 손에 있는 시계와 반지를 뺐고, 몸을 뒤져 금품을 강탈했다. 이 중령 부인의 핸드백도 뒤졌다.
또 방에 있던 5단으로 된 옷장을 모두 뒤져 그 안에 있는 옷가지 등을 닥치는 대로 방안에 내팽개쳤다. 고재봉은 “권총을 찾기 위해서”라고 진술했으나 수사기관은 현금이나 귀중품을 찾았을 것으로 봤다. 국산 캐비넷은 열었으나, 귀중품이 들어있던 외제 캐비넷은 워낙 튼튼해서 끝내 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핸드백, 캐비넷, 옷장 등에서 피가 묻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옷장에서 꺼낸 옷가지에도 피 묻은 흔적이 없었다. ‘죽이는 사람’과 ‘옷장 뒤지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추측을 낳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끝내 의문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2.정말 착각에 의한 살인일까.
고재봉은 이득주 중령 일가족을 살해한 목적을 ‘전임 대대장에 대한 원한’이라고 했다. 박 중령이 아닌 이 중령을 살해한 것은 ‘착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고씨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모순이 있다. 이 말이 성립되려면 고재봉은 박 중령과 이 중령을 구분하지 못했어야 한다.
그런데 고재봉은 이 중령이 전임 대대장 박 중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 고씨는 범행 일주일 전부터 이 중령 관사 부근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봤다. 이 중령 집에 지프차와 사람이 드나드는 것도 확인했다. 고재봉의 타깃이 박 중령이었다면 7일 동안 집 안팎을 살피고, 집 부근을 배회했다면 전임 대대장의 전출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또 대대장의 동태를 살폈을 텐데, 그게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고씨는 이 중령을 살해한 날 만년필형 전지를 들고 방에 들어갔고, 이 중령의 얼굴을 비춰봤다. 이때 즉시 누구인가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랬다면 애초 계획했던 범행계획을 중지하고 곧바로 집에서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고재봉은 전혀 망설임없이 당초 계획대로 실행했다. 또 도주하는 과정에서 이 중령의 신분증을 땅에 묻기도 했다. 고재봉이 한글을 모르는 일자무식도 아니고 신분증을 숨기면서 이름을 않았을 리 없다. 고재봉이 절도죄로 CID에 연행됐을 때 박 중령이 그를 찾아간 탓에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었다.
박병희 중령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고의 얼굴을 모르지만 고는 나의 얼굴을 똑똑히 알 것이고, 고가 그의 말대로 범행 일주일 전부터 내가 살던 집 주위를 배회하며 동정을 살폈다면 그 집에 나 아닌 이 중령이 살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살 때에는 집 앞에 내 문패를 똑똑히 붙여 두었다”고 말한 대목에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3.범행 목적 ‘원한’이 아닐 수 있다.
이득주 중령이 돈이 많다는 소문은 인근에 파다했다. 이 중령의 부인이 교사였고, 또 집안에 식모까지 두고 있었기에 형편이 넉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고재봉은 이 중령이 살고 있던 관사의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집 안에서 명태와 군화, 구두를 훔친 전력이 있어서다.
고씨가 박 중령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품고 원한이 컸다면 일주일 동안이나 집 부근을 배회하며 망설였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살해 현장도 ‘원한’ 보다는 ‘강도’ 흔적이 뚜렷하다. 고재봉은 시신의 손목에서 반지와 시계 등을 빼앗았고, 이 중령 부인의 핸드백도 뒤졌다. 집안에 있는 옷장은 모조리 뒤졌다. 또 귀중품이 들어있는 캐비넷도 털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고재봉의 범행은 ‘원한’ 보다는 ‘강도’에 무게가 실린다. 강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부터 먼저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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