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

수방사 방패교육대 ‘함광열 이병’ 사망사건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살던 함광열 이병은 1남1녀 중 장남이다.

그는 관광분야에 종사하고자 대전 우송대 관광계열학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는 댄스동아리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대학 2학년을 다니던 중 2002년 7월 군에 입대했다. 자대는 집에서 가까운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방패교육대로 배치받았다. 함 이병의 삼촌 함상웅씨는 “집에서 가깝다며 부모도 광열이도 좋아했다”고 전했다.

같은 해 9월18일 가족들은 군에서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았다. “함광열 이병이 사고로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군에 입대한 지 70일, 자대 배치를 받은 지 20일 만에 생긴 일이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충격을 받은 가족들이 속속 사고현장인 부대로 모여들었다. 군에서는 현장을 통제하고 사고 직후 4시간 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함 이병이 사망한 시각은 오전 10시46분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조사해 보자”고만 했다.

유족 대표로 삼촌 상웅씨와 함 이병 동생인 수진씨(당시 여고 2학년)가 현장에 들어갔다. 함 이병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부대 내 재래식 화장실 안에 숨져 있었다. 무엇에 놀란 듯 두 눈을 뜬 상태였다. 동생 수진씨는 “죽기 전 무엇엔가 크게 놀란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런데 현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상웅씨는 “나는 군에 있을 때 중대 사격 선수로 나갔었기 때문에 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장을 처음 봤을 때 소총(K2) 위치도 그렇고 탄창도 없었고, 특히 주위에 발라놓은 듯한 핏자국이 심상치 않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현장을 확인한 후 함 이병의 시신은 오후 6시쯤 인근 고양국군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군은 다음 날 아침 지휘보고 때 이미 함 이병의 사망원인을 ‘총기사고 자살’로 보고했다.

이후 자살로 몰아갔다고 한다. 군의 발표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사망 당일 부대 상황부터 달랐다. 당시 언론에는 이날 오전 부대 인근 자동화 사격장에서 ‘(함 이병이)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뒤 내무반 부근 야외 화장실에서 머리 부분에 관통상을 입고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상태로 발견됐다고 보도됐다.

함 이병의 사망진단서.

하지만 군이 유족에게 한 말은 달랐다.

‘사격을 마치고’가 아니라 “사격훈련 중 심부름을 보냈는데 사고가 났다”고 했다.

이처럼 전후 상황이 완전 달랐다. 군의 말대로 사격 중 심부름을 보냈다고 해도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군에서 사격장 안전수칙은 아주 엄격하다. 특히 탄피 하나까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군 수사기관에 따르면, 사고 당일 부대에서는 사격훈련이 있었다. 당시 함 이병의 소총이 고장 났고, 혼자 응급조치를 하던 중 실탄 한 발이 땅에 떨어졌다.

함 이병은 이것을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마침 교육대장(소령)이 함 이병을 행정반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함 이병은 그 길로 화장실로 가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족 측은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반박했다. 사격장에서 이등병인 신병에게 심부름을 보낸다는 것도 납득이 안 가지만, 무장한 채 심부름을 보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고 당일 실제 사격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오창래 위원장이 중대원 전원을 모아놓고 사격 시작시간, 사격 종료시간 등 교육 전반에 대해 물어봤으나 이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는 중대원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최초 목격자인 신 중위의 진술(왼쪽)과 박,윤 중위의 진술(오른쪽). 총의 위치가 달라져 있다.(연출)

최초 현장 목격자의 진술과 현장 상황도 달랐다. 함 이병 시신의 상체는 화장실 벽면에 기댄 채 오른쪽 다리를 포갠 상태였고, 왼쪽 다리는 바깥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방탄모는 앞쪽이 바깥쪽을 향한 채 반대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경비단 소속 신아무개 중위는 최초 발견 당시 “총기가 왼쪽 가슴 부위에 올려진 상태로 개머리판이 지면 방향, 총구가 하늘 방향으로 약 45도 기울어 있었다”고 수차례 진술했다. 군이 유족들에게 보낸 수사경위서에도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군이 현장을 공개할 때는 총기의 방향이 달랐다.

방탄모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고, 총구는 바깥쪽을 향한 채 놓여 있었다. 유족이 문제를 제기하자 군은 다른 목격자가 있다며 같은 경비단 소속 박아무개·윤아무개 중위를 등장시켰다.

이들은 신 중위가 현장을 보고 나온 지 20초 후에 화장실에서 함 이병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20초 차이로 총의 위치가 어깨에서 바닥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유족 측은 세 명의 목격자들 모두 군에서 만든 ‘가짜’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함 이병이 발견된 재래식 화장실은 당시 거의 사용하지 않던 곳이었다. 오래된 곳이라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고 파리와 모기떼가 들끓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로 앞에는 새로 지은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이곳을 사용했다.

그럼 왜 목격자들은 수세식이 아니라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왔던 것일까.

유족들이 신 중위에게 물어보니 “처음에는 수세식 화장실에 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 갔다”고 대답했다. 유족들은 신 중위의 말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수세식 화장실은 24시간 개방돼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 500~1000여 명이 교육을 받기 때문에 화장실을 닫아놓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사고 당시는 오전 10~11시로 교육생들 수백 명의 오전 교육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함광열 이병이 시신으로 발견된 화장실 내부.

유족들에 따르면, 목격자들의 진술이 엇갈린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함 이병이 발견된 장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군은 사고 당시 화장실 문이 닫혀 있었다고 말했다. 재래식 화장실 구조는 가로 폭 1m, 세로 폭 86cm, 높이 178cm의 아주 작은 공간이다.

K2소총의 길이는 97cm로 화장실의 세로 폭보다 길다. 무게는 3kg이다. 함 이병은 사방 1m도 안 되는 공간에서 어떻게 방아쇠를 당겼을까.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와 총알이 나온 사출구를 찾으면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함 이병의 왼쪽 귀 3cm 정도 위에 작은 구멍이, 오른쪽 귓구멍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보통 총기 사고의 경우 사입구는 작은 반면 사출구는 총알이 회전하면서 큰 구멍이 생긴다. 시신을 최초 검안한 군의관도 왼쪽은 사입구, 오른쪽은 사출구라고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함 이병이 총을 발사한 자세를 유추해 보면 왼쪽으로 총을 높이 치켜들고 20도 각도로 기울게 한 다음 발사했다는 것인데, 좁은 화장실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자세다.

뒤바뀐 사입구와 사출구.

그러자 군은 사입구와 사출구의 위치를 바꾼다. 민원회신을 통해 현장 및 사체부위 사진 판독 결과, 현장에 나타난 비산된 혈흔 방향, 총상의 형태 등에 의해 사입구는 ‘우측’, 사출구는 ‘왼쪽’이라고 번복했다. 군 수사는 이렇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이렇게 되면 총을 바닥에 세워 놓고 머리를 기울여 발사했거나, 대각선으로 놓고 쐈다는 것인데 좁은 공간에서 문을 닫고 쉽게 나올 수 있는 자세는 아니다.

유족 측은 “최초 목격자인 신 중위의 말대로 총이 왼쪽 가슴 위에 있었다면 사입구가 왼쪽일 수밖에 없다”며 “거짓 증인을 내세워 총의 위치를 바꾸고 오른쪽이 사입구라고 말을 바꾼 것”이라고 말한다.

화장실 안의 혈흔도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유족들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 화장실 벽과 문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닥은 핏자국이 없었다.

함 이병의 머리가 관통됐다면 총기와 방탄모에는 다량의 혈흔이 묻어 있어야 한다. 정작 방탄모와 총기에서는 혈흔이 묻어 있지 않고 깨끗했다.

함 이병이 벽에 기댄 상태에서 벽면에 묻은 핏자국.

벽면의 혈흔도 총을 발사했을 때 뿜어져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군은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관통되자 의식을 잃고 자연스럽게 머리가 왼쪽 벽면으로 이동하면서 혈흔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혈흔이거나 뿌려서 묻은 혈흔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문 안쪽에 있는 다량의 물방울 모양 혈흔 또한 조작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사고 당시 문이 닫힌 상태였다면 문이 열고 닫힐 때 겹쳐지는 부분에는 혈흔이 묻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곳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문이 닫힌 상태였다면 문이 겹쳐지는 곳에 혈흔이 묻어 있는 것은 설명이 안 된다.

총알이 함 이병의 머리를 관통했다면 화장실 안에는 탄흔과 파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족들이 군 검찰과 현장을 확인했을 때 화장실 안 어디에서도 이런 흔적은 없었다. 이렇듯 군 수사는 뒤죽박죽이었고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군이 함 이병의 사망원인을 ‘자살’로 결론 내린 것은 “타살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군이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군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사고는 조작됐다고 확신했다. 이후 유족들은 이 사건을 ‘함광열 이병 살해 사건’으로 명명했다.

사고 초기 군은 유족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현장 사진촬영을 요구하면 ‘군사보안’이라며 거부했다. 부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은 군의 부검 제안에 “조작 위험이 있어 못 하겠다”고 거절했다.

군의 거듭된 요구에 촬영을 조건으로 내걸고 수용했다. 부검 전 과정도 촬영하겠다고 했으나 군이 거부하면서 결국 부검은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들은 김대중 정부 말기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재조사를 하겠다고 나왔으나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유족들은 “형식적으로 하자는 것이었고, 나중에 보니까 각하시킨 것만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사이 유족들은 피눈물 나는 고통 속에 살았다. 함 이병의 시신이 고양국군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장례식장 안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군이 시신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그 곁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장례식장 한쪽에서 7년 동안 잠을 자며 생활했다. 이후 건물 증축을 이유로 바깥으로 내몰려 군용 천막생활을 시작했다.

그사이 직장에 다니던 함 이병의 부모는 생계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당시 고교 2학년이던 함 이병의 여동생은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장례식장에서 오갔다. 버스운전을 하던 삼촌은 회사를 그만두고 진상규명에 매달렸다.

함광열 이병의 삼촌 함상웅씨.

함 이병의 아버지는 대장암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도 온몸에 골병이 들었다. 삼촌인 함상웅씨는 유족 대표를 맡아 이 폭염 속에서도 천막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함광열 이병 또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차가운 군 병원 냉동고 안에 있다. 유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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