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사건

서울 신대방동 김은지양 실종사건

아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2002년 11월13일 새벽 5시, 잠에서 깨어난 김봉민 조옥자 부부는 깜짝 놀랐다.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큰딸 은지(5)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은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부부는 불길한 예감이 들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버지 김씨는 신대방역 개천을, 어머니 조씨는 보라매공원 구석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허사였다. 정신없이 길거리를 해매고 있을 때 파출소가 떠올랐다.

김씨 부부가 파출소를 찾아간 시간은 새벽 5시30분쯤.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찾아간 파출소였지만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핀잔만 들었다.

경찰관은 “조금 더 찾아보고 오전 9시쯤에 다시 오라”며 실종 신고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보라매공원 관리실을 찾아 은지를 찾는 안내 방송을 부탁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곳은 경찰밖에 없었다. 김씨 부부는 오전 9시에 파출소를 다시 찾아 실종 신고를 접수했으나 희망은 절망으로 다가왔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순찰 강화 등의 후속 조치 뿐 아니라 은지를 찾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 김씨 부부를 찾아온 것은 실종 신고를 접수한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나마 실종 전단지 몇 장을 가져간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 조씨는 경찰의 태도에 크게 분노했다.

“그날 새벽에 실종 신고만 제대로 받아줬어도 우리 은지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경찰서장의 딸이 없어졌다면 가만히 있었겠느냐”며 “만약 그랬다면 경찰서와 관내 파출소 경찰이 총 동원돼 온 동네를 뒤졌을 것이다. 경찰의 늑장 대처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경찰이 원망스럽고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은지가 집을 나간 사연은 애처롭다. 김씨 부부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한 주택가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다. 은지의 아버지 김씨는 간판업자를 따라다니며 하루 일당을 버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은지의 어머니 조씨는 식당에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집안에 있던 은지는 밤과 낮을 반대로 알고 지냈다. 전기세를 아끼려고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가, 부부가 집에 들어오는 밤에 형광등을 켰다.

밤이 낮인 줄 알았던 은지는 엄마 아빠가 잠든 밤에 밖에 나갔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은지가 없어진 후 은지 부모는 잦은 인기척에도 놀랐다. 밖에서 기척이 나거나 누가 문을 두드리면 혹시 은지가 아닐까 하고 뛰쳐나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은지가 실종된 후 김씨 부부는 생업을 포기했다.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거리에 나가 은지 사진이 실린 전단지를 배포했다. 태어난 지 4개월 밖에 안 된 은지의 동생 다미는 엄마의 등에 엎여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은지 부모는 화물차 한 대를 할부로 구입했다.

화물차에 간단한 세간을 챙겨 싣고는 전국을 돌며 은지를 찾았다. 각종 아동보호시설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줬다. 차에서 새우잠을 자고 끼니는 라면으로 때웠다. 그러나 은지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 사이 부부의 가계는 엉망이 됐다. 전단지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제작하느라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생활비가 바닥을 드러냈다. 카드 돌려막기로 간신히 버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화물차 할부금을 낼 수 없자 할부금융사에서는 차를 압류해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지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 집 근처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기를 권했다. 여의도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옮겼는데 청천 벽력같은 말을 들었다.

병명은 심장판막증. 김씨는 심장이 완전히 쪼그라들고 뇌경색, 부정맥, 갑상선 등 합병증까지 생겨났다. 은지 어머니는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병명을 알려주지 않은 채 혼자만 끙끙 앓았다. 남편의 병은 은지 때문에 속을 앓다가 생긴 것이다.

은지 어머니는 남편을 살려야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병원비를 낼 능력도 없는데다가 수술비는 더욱더 감당이 안 됐다. 동사무소·구청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급기야 병원에 하소연해 보기로 했다.

어린 다미를 데리고 사무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병원 직원들이나 환자 가족들에게 수도 없이 핀잔을 들었다. 다행히 한 병원의 도움으로 은지 아버지는 가까스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었다. 은지 아버지는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노동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일용직으로 나갈 수도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글세로 살던 집의 월세가 밀리고 보증금이 바닥나자 집 주인은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급기야 은지네 식구들은 길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사글세방에서 쫓겨난 후 며칠간은 청량리역 근처의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기거했다.

이곳도 어린 다미를 포함한 세 식구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나주봉 전미찾모 회장이 시장 골목에 있는 여인숙을 얻어준 덕분에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은지 부모는 그동안 수도 없이 자살을 결심했다. 삶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강을 찾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은지가 떠올랐다. 은지가 집에 왔는데 가족이 없으면 얼마나 막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 다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크다. 언니를 찾는다고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주지 못했다고 한다.

은지 어머니는 “제발 우리 은지를 돌려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은지만 돌려준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우리 은지는 아랫배 부분과 오른쪽 허벅지에 화상 흉터가 있다. 지나가다 이 아이 얼굴과 비슷한 아이가 있다면 배 한 번만 살짝 들쳐봐 달라”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은지를 알고 있거나 비슷한 사람을 봤다면 제보는 전미찾모(02-963-1256)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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