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사건

꼭 잡아야 할 ‘초등학생 살인’ 5대 미제사건

억울하게 죽은 초등학생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구리소년 살해사건, 이형호군 납치살해사건, 울산 초등학생 방화 살인사건 등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다. 어린 초등학생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전 국민의 공분을 샀던 사건들이다.

하지만 범인들은 숱한 의문만 남긴 채 깊이 숨어버렸다. 이들은 지금 ‘완전 범죄’가 됐다며 웃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살인은 마약과 같다. 한 번 살인하면 또 다른 살인 유혹에 쉽게 빠진다.

이들에게 ‘완전범죄’ 허락하면 안 된다. 그러면 또 다른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비록 개구리소년 사건과 이형호군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으나 범인의 실체를 파악해 어린 넋을 위로해야 한다.

1991년 3월 26일은 전국에서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 학생이던 우철원(당시 13세, 6학년), 조호연(당시 12세, 5학년), 김영규(당시 11세, 4학년), 박찬인(당시 10세, 3학년), 김종식(당시 9세, 3학년) 등 5명의 아이들은 집 근처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실종됐다.
부모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헤맸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가족들은 직접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면서 수백만 장의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실종 직후 생업을 밀쳐둔 채 전국을 뒤지고 다녔던 부모들은 3년 6개월만인 1993년 9월 눈물을 흘리며 자식 찾기를 포기했다.
공소시효 만료 약 4년을 앞둔 2002년 9월26일 전 언론사에는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을 톱뉴스로 올렸다. 사건 발생 11년 6개월 만에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꿀밤을 줍기 위해 와룡산에 올라갔던 사람이 아이들의 유골을 발견했고, 전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아이들은 살아있을지 모르는 ‘실종’ 상태에서 ‘사망 상태’가 됐다. 숱한 의혹이 난무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결국 2006년 3월25일 24시에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1991년 1월29일 오후 5시20분쯤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이형호군(9)이 납치됐다. 이군은 사건 발생 43일 후인 3월13일 낮 12시20분쯤 잠실대교에서 서쪽으로 약 1.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배수로(일명 ‘토끼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손이 스카프와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고, 사인은 코와 입이 테이프로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위에서 나온 음식물이 유괴 당일 친구집에서 먹은 점심으로 판명되어 유괴 직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범인의 협박전화에서 나온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서울·경기 출신의 30대 전후의 남자로 추정됐으며, 사건 당일 밤 11시부터 16일 동안 50여 차례의 전화통화와 10차례의 메모지로 피해자의 부모를 협박했는데, 그 수법이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이었다.
당시 수사에서는 성문(목소리) 분석 결과 범인을 1명으로 추정하다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돈을 순식간에 가져가기 위해서는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이때부터 범인을 2명으로 추측했다. 이러한 혼란은 수사 난항의 원인이 됐다. 이형호군의 친척 한 명이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영화 <그놈 목소리>가 개봉돼 범인의 실제 목소리를 공개했으나 범인 검거에는 실패했다.

2008년 5월30일 새벽 4시10분쯤 허씨의 집에 괴한 1~2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허아무개씨(72)에게 “당신은 맞아야 해”라면서 주먹과 발로 허씨의 얼굴 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다른 방에는 허씨의 손녀들이 잠들어 있었다.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놀란 허씨의 큰 손녀 은정양( 12)이 할아버지의 방으로 가서 괴한을 말렸다.
이때 허양과 함께 자고 있던 여동생(9)도 잠에서 깼다. 언니가 방에서 나간 후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지 마세요”라고 한 번 더 말하자 이번에는 “까불지 마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괴한은 허양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집 안에서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허씨가 폐품을 팔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 온 것을 감안하면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것은 아니라는데 무게가 실렸다. 허양을 납치한 후에도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도 없었다. 또 괴한은 침입 당시 흉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할아버지 허씨였다. 그런데 허씨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손녀가 끌려간 급박한 상황인데도 횡설수설하며 진술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말을 할 때마다 달라졌다.
경찰은 허양을 찾기 위한 수색을 더욱 강화했다. 집 주변과 반경 5km를 수색범위로 설정하고 경찰 헬기와 119구조견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그리고 사건 발생 13일째인 6월12일 유가면 용봉리 비슬산 자락인 용박골 6부 능선에서 허양이 입고 있던 반바지와 티셔츠 등 옷가지를 발견했다.

허양의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지점이다. 오후 5시쯤에는 300m 위쪽인 8부 능선 골짜기에서 119 구조견이 허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경찰은 시신의 부패 정도를 감안해 납치 당일 살해한 뒤 계곡으로 던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허양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다. 그러나 부패 정도가 심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지 못했다. 정액 검출도 불가능해 성폭행 여부도 알 수 없었다.
수사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경찰의 마지막 희망은 유일한 목격자인 허양의 할아버지. 그러나 계속된 진술 번복,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경찰은 허씨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사건 당시를 재현하도록 했고, 심지어는 최면수사까지 벌였는데도 유의미한 내용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할아버지 허씨는 사건 발생 84일 만에 지병인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일한 목격자가 사망하면서 수사는 절망적인 순간에 다다랐다. 결국 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제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2006년 9월6일 오후 3시40분쯤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D주공아파트 13층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삽시간에 이웃으로 퍼져나갔다.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성난 불꽃이 위층까지 올라갔다. 놀란 주민들은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소방차가 출동하고 소방관들이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화재가 난 아파트 안으로 물을 뿜어대며 안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그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연기 사이로 누군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집의 아들인 박아무개군(8)이었다.
소방관은 급히 박군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박군의 모습이 석연치 않았다. 머리에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고, 손과 발이 청테이프로 결박되고, 입도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소방관은 급히 박군의 입에 붙여진 청테이프를 떼어냈으나 심장이 뛰지 않았다.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소방관은 112에 전화를 걸어 “아파트 화재 진압 현장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는 초등학생을 발견했다”고 신고했다. 울산 남부경찰서 강력팀 형사들이 화재 현장으로 출동했다.
박군이 숨진 채 발견된 곳은 큰방이었고, 그 옆에는 검게 그을린 야구방망이와 부엌칼이 놓여 있었다. 경찰은 박군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다.

사인은 질식사였다. 박군의 기도에는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박군의 집에 침입한 범인이 야구방망이로 오른쪽 뒷머리를 내리친 다음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손과 발을 결박하고 입을 테이프로 막은 것으로 봤다.
그런 다음 불을 지르고 도망갔고, 박군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연기를 들이마시고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범인은 큰방과 작은방에 불을 지른 뒤 진열장 위에 놓여 있던 열쇠로 현관문까지 잠근 뒤 사라졌다. 도대체 누가 8살 초등학생을 야구방망이로 내려치고 불까지 지르고 달아난 것일까. 울산 남부경찰서는 형사 50여명으로 수사본부를 꾸리고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범행 동기, 증거, 목격자 등이 없어 수사에 진전이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가져간 박군의 이름과 주민번호가 새겨진 목걸이용 메달, 전화번호가 새겨진 아기 팔찌 등 귀금속 5점(당시 시가 100만원)이 전부였다.
경찰은 장물 전단을 만들어 부산, 울산 등 인근 금은방에 뿌렸다. 여기에 실 날 같은 희망을 걸었지만 의심가는 제보는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미제로 남고 말았다.

2000년 8월5일 인천시 계양구 작전동 ᄉ아파트 뒤편 공터에서 초등학교 2학년인 안아무개양(7)이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그때 20대 남성이 아이들에게 다가와 “백화점이 어디냐?” 고 물었다.
안양은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하면서 이 남성과 함께 길을 걸어갔다. 한 10m쯤 갔을 때다. 갑자기 몸속에 지니고 있던 흉기를 꺼낸 남성이 안양의 복부를 찔렀다. 안양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범인은 백화점 방면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주민 정아무개씨(37)가 안양을 발견해 곧바로 병원에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
길을 묻는 남성에게 친절하게 위치를 알려주려 했던 안양. 범인은 살인마로 돌변해 안양의 목숨을 빼앗았다. 범행의 목적도 불분명했다. 성추행이나 금품을 노린 정황은 없었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묻지마 살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전에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다. 안양이 살해되기 약 두 달 전인 5월31일 오후 6시25분쯤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다. 작전동의 다른 아파트 화단에서 박 아무개양(4)과 어머니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잠시 5층 집에 올라가면서 아이 혼자 남게 됐다.
그때 한 남성이 나타나 아이의 옆구리를 흉기로 찌르고 달아났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10분 사이에 범행이 일어났다.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던 아이는 어머니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목격자도 없었다. 이 날은 야속하게도 비가 내려 경찰이 증거물을 찾기조차 어려웠다. 범인의 수법은 안양 사건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범행 목적이 불분명한 묻지마 범죄에 가까웠고, 흉기로 단 한 차례만 찔렀다. 범행에 사용한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두 어린이의 피살사건’이 동일인의 소행일 수 있다며 연관 조사를 벌였다. 범행시기와 장소‧수법이 비슷해 두 사건의 연관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했다. 하지만 목격자, 현장 증거가 거의 없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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