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

무장군인 김해경찰서 습격사건

1965년 7월24일 경남 김해에는 폭우로 인해 수재민이 발생했다. 이날 밤 11시쯤, 김해경찰서 김효근 순경(26)은 수재민 수송에 출동하려고 트럭에 휘발유를 넣고 있었다.

이 모습을 사복차림으로 지나가던 육군공병학교장 정극서 준장(42)이 목격했다. 정 준장은 군복차림의 김 순경이 휘발유를 훔쳐 파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의 뒷머리를 때리며 “왜 휘발유를 팔아먹느냐?” 고 호통쳤다.

갑작스런 상황에 격분한 김 순경은 호스로 정 준장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다. 두 사람은 시비가 벌어지면서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앞서 정 준장은 중국음식점에서 일행 6명과 맥주 2병, 고량주 4병을 마치고 술에 취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 순경과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김 순경이 경찰서로 향하자 정 준장은 그를 뒤쫓아갔다. 경찰서 안에서 정 준장은 “김 순경을 구속하라”며 술주정을 부렸다. 그는 또 “청와대로 경비전화를 걸라”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대 주번사령에게 전화해 “내가 경찰관에게 봉변을 당했다”며 “1개 분대 병력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공병학교의 부교장, 참모장, 작전처장, 주번사령 등 7명의 장교들이 3대의 지프를 타고 경찰서로 몰려들었다. 밖에는 무장병력 20~30명이 트럭 2대에 타고와 경찰서 앞에 대기했다.

이중 작전처장(중령)은 숙직 경찰관의 멱살을 잡고 한 차례 구타하는 등 소란을 피우다 사라졌다. 다음날 이 사실이 부산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에 보도됐다.

이때부터 군의 2차 보복이 시작된다.

7월27일 오후 11시50분쯤, 한국일보 김해주재 조인환 기자 집에 군복을 입은 괴한 2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조 기자 집 현관문을 두드린 후 ‘누구냐’고 묻자 “공병학교 참모장이 사과를 보내서 가져왔다” 말했고 문을 여는 순간 벽돌로 조 기자의 머리를 강타해 그 자리에 쓰러트린 후 도주했다.

조 기자는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 군 기관에서는 정 준장과 학교 동창인 권중오 김해경찰서장(경감)에게 “신문기사는 거의 허위보도다”는 해명서를 요구해 받아냈다.

그러자 군의 3차 보복이 시작된다.

7월29일 새벽 5시쯤, 계급장이 없는 무장군인 30여 명이 501방첩대원 6명과 합세해 군용트럭 2대와 지프에 분승해 김해경찰서를 습격했다. 권총과 카빈으로 무장한 이들은 정문 보초 순경의 제지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중 5명은 교환실에 침입해 전화선을 끊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당직 중인 수사계장에게 “김효근 순경의 소재를 대라”고 위협하는 한편 숙직 경찰관 두 명을 무기로 때리고 숙직실에서 잠들어 있던 김 순경을 끌어냈다. 김순경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실려 공병학교를 거쳐 501방첩대로 향했다.

경찰서에서 나온 무장 군인 일부는 김해 대성동에 사는 경향신문 권도호 기자 집으로 향했다. 이날 새벽 4시50분쯤, 권 기자가 잠들어 있을 때 대문 밖에서 ‘권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권기자’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권 기자의 아버지가 ‘없다’고 하자 군복 괴한 3명 중 1명이 담을 넘어와 대문을 열고 다른 괴한 2명과 함께 집 안으로 침입해 마루 전등불을 켰다. 이중 2명은 카빈을 들고 있었다.

괴한들은 권 기자에게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신변을 보호해야겠다”며 동행을 강요, 거부하자 강제로 지프에 태웠다. 이 지프는 육군공병학교에 들렀는데 공병학교 교정에 있던 소령 계급장을 단 헌병차림의 군인이 “빨리 부산으로 가라”고 신호, 그뒤 부산 주둔 501방첩대로 갔다.

김해 동산동에 사는 부산일보 최임조 기자도 새벽 5시쯤 무장괴한 6명에게 강제 연행돼 501 방첩대로 끌려갔다. 새벽시간 기습적으로 방첩대에 끌려온 김순경, 권기자, 최기자는 모진 고문을 당하는 보복을 당한다.

김 순경은 방첩대에 끌려 온 당일 오전 6시부터 11시까지 약 5시간 동안 발길질과 함께 몽둥이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았다. 사복차림의 방첩대원들은 김 순경에게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허위사실”이라는 진술서와 “공병학교 교장인줄 알면서 정 장군을 때렸다”는 요지의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는 겁에 질려 마지 못해 진술서를 쓰고 정오쯤 풀려나 부산시내 경찰병원에 입원했다. 김 순경은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경향신문 권 기자는 시멘트 바닥의 창고 같은 곳에서 몸집 좋은 사복 군인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몸 7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매를 맞다 실신하자 물을 끼얹기도 했다.

부산일보 최 기자도 몽둥이로 얻어 맞고 상처를 입었으며 그는 풀려나서도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이 겪은 일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두 기자는 고문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호 납치된 지 약 10시간 만에 풀려나와 김해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권 기자와 최 기자는 각각 전치 1주,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었다.

관련 언론 보도.

7월30일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정부는 군경합동수사반을 편성하고 수사에 들어간다. 합수반 수사를 통해 이 사건에 방첩대가 관여한 것은 당시 501방첩대장이던 정명환 대령이 ”기자들의 보도에 얽힌 이적행위 여부를 가려내라“며 직접 지시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사는 ‘윗선 개입’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합수반은 사건 당일 출동한 병력의 숫자와 경찰서에 난입한 무장군인들의 신원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해경찰서 서장과 김효근 순경은 대기발령, 경찰서에 난입했던 501방첩대원 6명 중 4명의 사병과 지시를 내린 주번사령(대위)은 특수감금 및 가혹행위 혐의로 구속돼 군수기지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 송치됐다.

김해공병학교 작전처장(중령)과 당직사령(중령)은 특수폭행상해 혐의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이들 군인들은 군사법원에서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받으면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군인들의 최고 지휘관인 정극서 준장은 예편하며 군복을 벗었고, 501방첩대장 정명환 대령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들에게 피해를 입었던 언론사의 김해 주재 기자 3명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기자생활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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