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

육군 제26기계화보병사단 장교 사살사건

1953년 6월 창설된 육군 제26기계화보병사단(불무리 부대)은 2018년 11월 제8기계화보병사단에 통합돼 해체됐다. 주둔지는 경기도 양주였다.

1994년 10월31일 오전 사단 예하 제123기계화보병대대 3중대원들이 중대 연병장에 모였다. 이들은 이날 오후에 실시될 개인화기(K2) 영점사격 훈련을 앞두고 오전 9시부터 1시간45분 동안 강도 높은 사격술예비훈련(PRI)를 받았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쯤, 중대장 김수영 대위(31‧육사 44기)가 소대장 2명과 중대원 66명을 이끌고 73여단 사격장에 도착했다. 사격장은 약 6,611㎡(2천평) 규모로 8개의 사로가 설치돼 있고 사로간의 간격은 2m, 사선의 높이는 1.5m였다. 사선 후방 5m 지점에 판초우의를 깐 임시 탄약배분소가 설치됐다.

김 대위의 통제 아래 소대장인 황재호 중위(23‧학군 31기)는 사격장 뒤편에서 탄창을 나눠주는 임무를 맡았고, 조민영 중위(23‧학군 23기)는 그 옆에서 10발씩 탄알을 탄창에 끼워 병사들에게 나눠졌다.

사격은 영점이 잡히지 않은 사병 14명의 사격이 있은 뒤 10명씩 7개조(마지막조는 6명)로 편성돼 오후 1시50분부터 축소 사격이 실시됐다.

오후 2시25분쯤, 3조까지 사격을 마치고 표적지를 확인하는 동안 다음 차례인 4조는 황 중위에게 각각 10발의 실탄이 든 탄창집 2개를 건네받아 사격대 위에 올라갔다. 표적을 향해 서 있던 병사들은 통제관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탄창을 총에 꽂았다.

그때 3소대 서문석 일병(21·화기분대 M60부사수)은 탄창 1개를 K2소총에 끼우고 점사(2~3발씩 발사됨)로 조정했다. 이어 갑자기 돌아서서 사병들에게 “비켜, 엎드려”라고 소리쳤다. 서 일병은 뒤쪽에 있던 자신의 소대장인 황 중위의 목을 향해 2발을 발사했고, 황 중위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서 일병은 총기를 황 중위 옆 1.5m 거리에 앉아 있던 조민영 중위 쪽으로 돌려 2발을 지향 사격했다. 표적지 쪽에 있던 20명의 사병은 물론 탄약분배대 양측에서 대기 중이던 모든 사병들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엎드렸다.

서 일병은 숨 돌릴 틈도 없이 30m 전방 사격선에 있던 중대장 김수영 대위에게 서서쏴 자세로 또다시 2발을 발사했다. 총격을 받은 김 대위도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서 일병은 사격장 입구 쪽에 엎드려 있던 옆 소대 분대장 김효열 병장 쪽으로 가서 총구를 겨누며 “일어서”라고 외쳤다.

이때 김 병장은 일어서는 척하다 순간적으로 총기를 빼앗아 던진 뒤 사격장 입구 쪽으로 달아났다. 당황한 서 일병은 곧장 탄약분배대 주위에 사총돼 있던 소총을 집어 들고 나머지 탄창 1개를 삽탄, 장전한 뒤 땅바닥에 5발을 위협 사격했다.

그리고는 사선쪽을 향해 서서 총구를 자신의 우측 머리에 밀착하고 그대로 격발, 두부파열상으로 즉사했다.

모두 16차례의 총성에 이어 마지막 한 발의 총성이 울린 뒤 적막이 찾아왔다. 악몽의 순간은 불과 50여 초에 불과했다. 주위에는 60여명의 사병들이 있었고, 특히 8명은 총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서 일병을 향해 총을 쏘거나 몸으로 덮쳐 제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 일병의 난동으로 인해 장교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목에 관통상을 입은 3소대장 황재호 중위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2소대장 조민영 중위는 복부관통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중대장 김수영 대위는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군 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

육군은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건 경위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번 사건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가한 뒤 불우하게 자라 막연하게 가진 자, 상관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오던 서 일병이 기회가 오자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육군에 따르면 서 일병은 이미 여러 차례 사고 징후를 보였다. 범행 며칠 전 서 일병은 재혼한 모친의 회갑이 있다며 청원휴가를 나갔으나 예정보다 빨리 귀대했다. 잘 살 줄 알았던 어머니가 가난하게 살자 크게 상심했고, 어머니가 준 교통비 5만원도 그냥 두고 말없이 귀대했다고 한다.

고 김수영 대위.

범행 당일 오전 보초근무를 섰던 서 일병은 유아무개 이병(21)에게 “오후에 사격이 있으니 탈영하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서 일병은 또 친한 동료들에게 농담조로 “높은 놈들을 쏴 죽이겠다” “사격 훈련 시 사람을 죽이고 탈영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군의 발표가 맞다면 움직이는 시한폭탄 하나가 째깍 째깍 터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서 일병이 사병들은 피하게 하고 장교들에게만 조준사격을 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보통 군 총기사고는 원한관계인 특정인을 표적으로 삼거나 총기를 무차별 난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 사건은 의도적으로 장교만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6차례 실시된 군 면담 기록을 보면 서 일병이 “규정을 잘 지키는 모범사병”으로 적혀 있는 것도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김수영 대위 황재현 중위
외아들 돌잔치 하루 앞두고 참변 당한 중대장

전남 장흥 출신인 김수영 대위는 육사를 나와 1988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전방사단과 광주 보병학교 전사학 교관 등을 거쳐 1993년 6월 이 부대로 전보, 줄곧 3중대장을 맡아왔다.
임관 후에는 이념교육교관 최우수상(93년), 장병정신교육 유공표창, 지휘성공사례 최우수표창(이상 94년)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고 5일 전에는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강재구 소령 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맡은 3중대는 93년 26사단 최우수 중대로 선발되기도 했다. 특히 김 대위는 외동아들의 돌잔치를 하루 앞두고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황재현 중위는 학군사관후보생 31기로 대구대 정보통신공학과를 93년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다. 제대를 6개월 정도 앞두고 변을 당했다.

서문석 일병은 누구
둘째 형도 군 복무 중 극단적 선택

서문석 일병은 충남 태안 안면읍 중장리에서 3남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지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 3월 서울 Y공고 야간과정에 입학하면서 상경해 구로동에서 자취생활 했다.

1993년 12월 군에 입대해 다음해 1월에 26사단에 배치됐다. 군 입대 전에는 폭행 사건에 연루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에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고 불운도 끊이지 않았다. 재가한 어머니는 의붓아버지가 중풍으로 앓아누우면서 경제력을 상실하자 생활보호 지원금으로 겨우겨우 살았다.

1991년 3월에는 군 복무 중이던 둘째 형이 청산가리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