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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복판의 혈투’ 뉴월드호텔 조폭 보복 살인사건

서울 강남은 유흥업계 최고의 노른자위로 불린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돈이 흘러다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전국의 조직폭력배(조폭)들은 너도나도 강남으로 진출했다. 이름 좀 있다는 조직은 나이트클럽, 룸살롱, 오락실 등을 통해 강남에 거점 하나씩을 마련했다.

이렇게 진출한 조폭들은 지하경제의 ‘큰 손’으로 불리며 검은돈을 좌지우지했다. 지역 조폭들에게 강남은 ‘전국구 조폭'(전국을 무대로 하는 조폭)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전국 주먹계를 제패했던 조직들도 강남 유흥가를 배경으로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강남 유흥가는 전국 폭력조직들의 각축장이 됐다. 특히 호남지역 조직들은 강남의 중심가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혈투를 벌였다.

1990년 10월 당시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폭력배들에 대한 일제 소탕에 나선다. 이때 강남 유흥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서방파의 김태촌이 구속된다.

절대강자가 사라지자 이 틈새를 노리고 신흥 조폭들이 강남으로 몰려든다.

서울 서초구 반포4동 팔레스호텔 일대 유흥업소는 범서방파의 방계조직인 영산파가 이권을 장악했다.

이 조직은 1989년 최창호가 광주와 나주 영산포 출신 폭력배들을 규합해 결성했다. 이들은 서울로 진출해 영등포구와 강서구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조직원은 약 50명 정도였다.

여기에 세력확장을 노린 광주지역 폭력조직 신양파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양파는 광주 동구의 이은규가 결성한 오비동재파의 방계 조직으로 조직원은 약 150명 규모다.

1991년 10월7일 오전 1시쯤 신양파 조직원들은 영산파가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신 후 마담과 술값 시비를 벌인다. 이때 영산파 조직원들이 끼어들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당시 사건을 다룬 중앙일보 1991년 10월8일자.

신양파 조직원 12명과 영산파 조직원 8명 등 20명은 팔레스호텔 앞 대로에서 낫, 도끼, 생선회칼을 들고 집단 난투극을 벌였고, 영산파 두목 최창호가 신양파 박진수가 휘두른 생선회칼에 옆구리를 찔려 숨진다. 또 신양파 조직원 3명은 영산파가 휘두른 흉기에 가슴 등을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두목을 잃은 영산파는 와해된다. 1994년 3월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한 합숙소에서 정광채와 안영구 등이 조직 재건을 모색했고, 이하영이 대흥동파로 재결성한다.

대흥동파(영산파)는 ‘조직원들이 반대파로부터 공격받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철저히 보복한다’는 행동강령에 따라 ‘피의 보복’을 다짐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4년 11월 박진수가 출소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흥동파는 집단 합숙을 하며 칼을 갈기 시작한다.

12월4일 오후 3시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뉴월드호텔(현 라마다호텔)에서 신양파 조직원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대흥동파는 박진수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구체적인 보복 계획을 세운다.

결혼식 당일 대흥동파 두목 이하영과 행동대장 정동섭 등 조직원 12명은 회칼 등으로 무장하고, 호텔 인근에서 대기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양파 조직원들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대흥동파 조직원들은 일제히 회칼을 휘두르며 칼부림을 시작했다.

최우선 타깃은 박진수였다. 대흥동파 조직원들은 박씨로 보이는 사람을 쫓아가 회칼로 난자했다.

사건 직후 현장 사진.

하지만 그는 박진수가 아니었다. 다른 조직원을 박씨로 오인해 살해한 것이었다. 이날 보복으로 신양파 조직원 2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범행 직후 대흥동파 조직원들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달아났다.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여 대흥동파 두목, 고문, 조직원 등을 붙잡아 법의 심판대에 넘겼고, 이들에게는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다.

현장 인근에 버려진 생선 회칼.

그러나 범행에 가담한 정동섭과 서아무개 등 2명이 도주하면서 ‘미완의 사건’으로 남았다. 경찰이 추적에 나섰으나 두 사람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들은 한동안 수사기관의 감시망을 피해 숨어 지내다 2003년을 전후해 각자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파악됐다.

서씨의 경우 전북 군산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입국했다. 이들은 현지 공안의 눈을 피해 공장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수시로 만남을 가졌고, 심지어 가족을 중국으로 초대해 재회하는 등 대범한 행각을 벌였다.

대흥동파는 중국을 왕래하며 서씨와 정씨의 도피생활을 적극 지원했다. 국내에 있는 두 사람의 가족들 경조사를 대신 챙겨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두목 이씨에게도 매달 영치금과 가족 생활비 등의 명목으로 10년간 484회에 걸쳐 3억 2300만원을 지원했다.

경찰에 검거된 공범들.

사건발생 28년이 지난 2022년 3월, 심양에 있는 주중 한국 영사관에 한 남성이 나타난다. 도주행각을 벌이던 서씨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며 밀항사실을 자진신고한 후 귀국했다.

서씨는 해경 조사에서 밀항 일자를 ‘2016년 9월’이라고 속인다. 밀항 시기는 그의 처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만일 서씨의 말대로라면 살인죄 공소시효 15년이 완성돼 처벌이 불가능했다.

현행법은 범인이 형사처분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로 도피하는 경우 그 기간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서씨가 실제 밀항한 해인 2003년은 사건발생 15년이 지나지 않은 때여서 공소시효 완성 이전이다.

2015년 7월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2001년 8월1일 이후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서씨는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서씨는 밀항 일자를 조작해 살인죄 처벌을 피하겠다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해경은 서씨의 의도에 말려 들어갔다. 그의 진술대로 밀항 시기를 2016년으로 판단해 밀항단속법 위반 혐의로만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서씨는 쾌재를 부르며 일반 시민들과 섞여 거리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서씨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밀항 시기를 공소시효 완성 이후로 진술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검찰은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서 광주지방검찰청으로 이송했다.

광주지검은 검사와 수사관 등 20여 명으로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전면 재수사에 나섰다. 이를 위해 서씨와 도주 중인 정동섭 등 관련자들에 대한 계좌추적과 통화내역 분석, 압수수색 등 전방위 수사에 돌입한다.

서씨가 국내에 언제까지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각도로 살펴본 결과 1996년 이후 서씨의 행적이 전혀 없었다.

반면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중국에서 서씨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났다. 수감 중인 대흥동파 조직원들의 교도소 접견 녹취록 등에서도 서씨의 밀항 행적을 엿볼 수 있었다.

검찰은 이렇게 확보한 증거들을 토대로 서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신병확보에 나섰다. 서씨가 국내에 입국한 지 약 일 년이 되는 시점에 검찰 수사관들은 전남 나주 시내의 한 식당에서 그를 체포한 후 구속했다.

당시 서씨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거주지가 아닌 지인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검찰의 추궁에 서씨는 “처벌을 피하려고 밀항 시점을 거짓말 했다”고 자백했다.

검찰은 서씨를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와 밀양단속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이제 도주 중인 정동섭만 잡으면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을 끝낼 수가 있었다. 검찰은 정씨 행적을 쫓는데 수사력을 집중했고, 그가 중국이 아닌 국내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정씨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찰은 수사망을 좁히며 그를 쫓았지만 도무지 정씨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7월26일 공개수배로 전환하고 정씨의 얼굴 사진과 인적사항 등을 공개했다. 정씨 입장에서는 대낮에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더 이상의 퇴로도 없었다.

도피행각을 벌여 온 대흥동파 행동대장 정동섭.

공개수배한 지 16일 만인 8월11일 정씨는 서울 관악구의 한 숙박업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하루 전날 입실한 정씨가 다음날 퇴실하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숙박업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현장에는 외부 침입 흔적이나 시신에 외상은 없었으며, 유서가 발견돼 극단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검찰은 정씨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정씨의 마지막 살인은 바로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29년간의 길고 길었던 살인 조폭들의 사법처리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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