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한반도

현역군인 최고 계급 ‘유운학 중령’ 월북사건

경기도 연천 일대 비무장지대(DMZ)는 육군 제20사단이 경계를 맡고 있었다.

1977년 10월20일 오전, 60연대 대대장인 유운학 중령은 DMZ을 순찰한다며 무전병을 데리고 지프차에 올랐다. 부대를 벗어나 철책선 입구에 도착하자 유 중령은 차를 멈추게 했다. 이어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운전병과 무전병을 위협했다.

그는 “나와 함께 북으로 가자”며 월북을 강요했다. 무전병인 오봉주 일병은 유 중령의 위협에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운전병은 “저는 못 갑니다”라며 거부했다.

유 중령은 운전병의 발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사람은 부상당한 운전병을 뒤로한 채 지뢰가 매설돼 있지 않은 폭 25m인 역곡천을 따라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전방 대대장의 월북에 군은 비상이 걸렸다. 즉시 청와대에도 보고가 올라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떨이까지 집어 던지며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20사단을 비무장지대에서 빼라고 지시했고, 그날 밤 연천의 20사단은 비무장지대 경계 작전부대에서 빠졌다. 그 자리에는 양평의 5사단이 들어갔다.

DMZ은 육군의 11개 사단이 경계작전을 수행한다. 1개 사단은 감시초소(GP)와 전방초소(GOP) 철책선 등의 경계작전구역을 동쪽과 서쪽 둘로 나눠 각각 1개 대대가 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대대장의 월북은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군 당국은 유 중령의 월북을 은폐하는데 급급했다.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해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 중령이 미모의 북한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북측 전단에 실려 한국군 최전방에 살포되자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대신 보안사의 주도아래 유 중령의 월북을 ‘납치’로 둔갑시켜 유엔사에 보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 발생 6일 만에 첫 보도가 나갔지만 월북이 아닌 ‘피랍’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유 중령과 오 일병을 납치해갔다고 왜곡했던 것이다. 주한유엔군사령부는 이걸 그대로 믿고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회의에서 납치된 장병을 송환할 것을 북한 측에 요구했다.

군은 이렇게 국민의 눈과 귀를 속였던 것이다.

유 중령의 월북 동기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았다.

군 당국은 도박 빚, 여자문제, 가정불화 등으로 몰고 갔다. 부대 매점(PX)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월북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당시엔 군부대 매점을 대대장이 관리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언론 기사와 보안부대장이었던 이학봉 중령.

그러나 가장 유력한 동기는 ‘보안대의 횡포’였다.

유 중령은 월북 후 “보안부대 등쌀에 못 이겨 넘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각 사단에는 보안대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대 단위에도 사단 보안대에서 요원들이 파견 나와 있었다.

유 중령이 월북할 당시 20사단장은 김영동 장군이었다. 그는 대대ATT(전투력측정)를 준비하면서 꼴찌를 하는 대대장은 보직을 해임하겠다고 밝혔다. 군에서 ‘보직해임’은 군 생활에 있어서도 치명적인 오점이다. 향후 승진에서도 누락될 가능성이 많았다.

사단장의 말에 대대장들은 긴장했다. 이들은 보안대를 통해 ATT 평가단에게 로비를 했다. 이때만 해도 대대장들이 사단 보안대에서 파견 나온 병사에게 용돈을 주고 편의를 봐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유 중령은 달랐다.

그는 대대장 보직을 맡기 전에는 보병학교에서 유능한 전술교관이었다. 누구보다 ATT 훈련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유 중령은 보안대의 농간으로 ATT 평가에서 꼴지를 하고 말았다. 여기에 분개한 그는 월북을 선택했던 것이다.

유 중령과 함께 상무대보병학교 전술학처 유격대와 20사단에서 근무한 한 예비역 장교도 비슷한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적었다.

그는 2009년 6월13일 자신의 블로그에 쓴 ‘아! 유운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유 중령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했다.

그는 전술학처 대대공격 교관 때 우수교관으로 뽑혀 함께 표창을 받으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소개했다. 유 중령의 성격에 대해 “대단한 집념과 고집과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고 적었다.

유 중령이 같은 사단의 작전주임일 때는 “군단장으로부터 인정받는 작전주임이었는데,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밑에서 근무하는 부하들이 불평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이어 유 중령은 “일요일에도 부대에 나가 일을 하는 일벌레 였다”고도 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작전주임 시 중령으로 진급과 동시에 전방 대대장으로 부임했다고 한다.

북한의 선전 선동물에 등장한 유운학 중령.

다른 대대장들이 보안대에 로비할 때 유 중령은 태평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되더라도 보병학교 대대공격 우수교관이 대대 ATT에서 꼴찌야 하겠느냐”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글 말미에 “소신이 너무 뚜렷하고 일을 너무 완벽할 정도로 잘하여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경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는 정말 멋진 군인이었는데. 당시에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의 소신파가 입은 피해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적었다.

전술학 교관 출신인 유운학 중령이 월북하면서 군 당국에는 후폭풍이 불어 닥쳤다. 먼저 국군의 전방경계작전에 관한 내용과 지침이 모두 교체됐다. 군의 암호체계, 전술교범, 훈련체계 등도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

연대 책임을 물어 군단장과 사단장, 사단 보안부대장이 보직해임을 당했다. 이때 보안부대장이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인 이학봉 중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라는 후광 덕분에 기사회생해 전두환 세력의 주축이 됐다.

북한의 선전 선동물.

박정희 대통령은 ‘유운학 월북사건’ 재조사를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 당시 조사를 맡은 중정의 5국장이 바로 박근혜 정권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의 정보처를 폐지하는 등 권한이 크게 축소됐다.

전북 출신인 유운학 중령은 여산중학교와 전주공고를 졸업했다. 갑종장교 182기로 임관하면서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월북 당시 대전에 거주하던 아내와 아들 둘이 있었다.

월북 후에는 남한에서의 계급을 고려해 1계급 승진돼 북한군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현재는 생사가 불명하다. 한편, 1953년 휴전 이후 월북한 국군 장병은 총 453명이다. 이중 장교는 42명(9.3%)이며 유 중령이 최고 계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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