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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연기자의 恨’ 배우 김석균 사망사건

그가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죽어서야 비로소 유명해진 그는 바로 ‘무명 배우’였다.

김석균은 1979년 4월9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스물 일곱살 때인 2006년 아동극 배우모집 공고에 응모해 합격했다.

그는 한 신인 연예인 전문 마케팅 업체의 홍보 인터뷰에서 “영화가 끝난 후의 기분 좋은 잔상과 오래도록 남는 여운이 좋아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석균은 데뷔 이후 아동뮤지컬 <정글북>, <피노키오>와 영화 <코리안랩소디>, , <아날로그 러버>, <과식>, <눈빛이 흔들린다> 등 10여 편의 중・단편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자로서 빛을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의 엑스트라를 전전했다. 한 번은 단편영화의 주연을 맡아 두 달여를 죽도록 연습했지만 크랭크인 3일 전에 제작이 취소되면서 크게 실망한 적도 있었다.

그는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영화와 뮤지컬 등의 오디션에 계속 지원했지만 번번이 쓴잔을 맛봤다. 김석균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고 토로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배우로서의 열망은 꺾지 않았다. 비록 지금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배우를 선택한 데 대해 한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며 연기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무명생활이 길어지면서 자신감을 잃어갔다. 우울증까지 찾아오면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텼다. 그리고 그는 서른 살 때인 2009년 스스로 삶의 의지를 놓아 버렸다.

그해 1월17일 오후 4시쯤 서울 은평구의 자택에서 어머니에 의해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다. “가족에게 미안하고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서도 남겼다.

경찰은 김석균이 오랜 무명생활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려온 점 등에 미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배우 설경구와 양조위를 좋아했던 고인은 “소시민이나 비주류를 연기해서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뜻을 펼치지 못했다.

그의 미니홈피에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타이틀 아래, 암을 이긴 사이클의 신화 랜스 암스트롱이 남긴 “암이 내 육신을 바꿔놓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정신을 바꿔 놓았을 뿐이다”는 말이 남겨져 있었다.

김석균은 다른 무명 배우들처럼 죽어서야 비로소 유명해졌다. SNS를 통해 추모의 글 한마디 남긴 유명 연예인은 없었지만 주요 언론에 그의 부음기사가 떴고,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그의 이름이 올랐던 것이다.

김석균의 죽음은 무명 연예인들의 쉽지 않은 삶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연예인이다. 이들에게 죽음으로 존재를 알리는 일은 그 자체로 무척 가혹하고 슬픈 일이다. 안타깝게도 김석균 죽음 이후에도 여러 무명 연예인들이 쓰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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