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사건한반도

창군이래 최대 국군 월북 ‘강태무・표무원 사건’

강원도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6여단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당시 26세)과 제2대대장 강태무 소령(당시 26세)은 북한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1949년 5월3일 오후 제2대대장 강태무는 대대 병력을 소집한다. 그는 연대의 작전명령에 따라 38선상에 있는 북한군 고지를 공격한다는 거짓 명령을 하달했다.

이를 빌미로 부대원들을 현리(현 인제군 기린면)로 이끌고 가서 숙영한 뒤 다음날 새벽 출발해 38선을 넘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에 포위되자 강태무는 투항을 명령했다.

부대원 중 일부는 투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하며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대대원 500여명 중 143명이 귀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1대대장 표무원도 다음날 행동을 개시한다. 5월4일 점심을 먹은 뒤 야간행군을 한다며 대대원 455명을 집결시켰다.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한 대대는 38선을 넘었고 매복해있던 북한군에 포위했다.

표무원은 강태무와 마찬가지로 대대원들에게 투항을 명령했다. 이때 최동섭・한정희 중위는 투항을 거부했고, 자신을 따르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해 239명이 귀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창군이래 최대 국군 월북사건으로 기록되며 국군의 흑역사가 됐다.

이후 육군본부는 제7연대와 제8연대를 교대하게 했고, 사건의 책임을 물어 6여단장 김백일 대령, 8연대장 김형일 중령은 직위해제됐다. 이응준 육군참모총장도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후임에 채병덕 장군이 부임했다.

표무원 강태무 월북 평양시민환영대회.

표무원과 강태무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고향 친구다. 보통학교를 같이 다녔고 군사영어학교와 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 동기생이다.

표무원은 일본 동경에서 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군에 들어가 군조(중사)로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에는 좌익계열 군사단체에서 활동하다 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경비사관학교는 한국 정부 수립 후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될 때까지 1기에서 6기에 걸쳐 총 1천254명의 간부를 배출했다. 강태무는 동경에서 대학을 나온 뒤 귀국 후 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공산주의자인 친형 강태열이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소개하고, 김구 선생 추천을 받아 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강태열은 남로당 간부로 활약하다 월북했다. 표무원과 강태무의 월북은 숙군작업과 관련 있다.

여수·순천과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 좌익의 반란이 계속되자 군내 좌익 색출이 시작됐다. 서울 태능에 주둔한 제1연대(연대장 이성가 소령)는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 출신인 김창룡 소위를 발탁해 숙군작업의 실무를 맡겼다.

그는 일제시대 경찰관이나 헌병 출신들을 뽑아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본격 활동에 나섰다. 북로당의 남한책임자인 성시백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진 표무원・강태무는 군내 좌익활동을 하다 김창룡의 정보망에 걸려든다.

김 소위는 두 사람의 구속을 건의했으나 이응준 참모총장은 공산당 가입 사실이 없고 38선 경비를 맡은 부대 책임자인 만큼 조사를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위기를 느낀 표무원과 강태무는 월북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 이 참모총장은 월북을 방조한 것이 됐다.

월북한 두 사람은 북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북한 선전물에 등장한 강태무.

표무원은 북한군 연대장과 재북의거자 정치학교 교장,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96년 다시 군복을 입고 북한군 현역 중장(남한의 소장 계급)을 달고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6.25전쟁기념관) 강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4월15일 81세로 사망했다.

강태무는 인민군에서 대대장, 연대장을 거쳐 제3사단 부사단장, 군사정치학교 교장, 10사단장을 지냈고 인민군 중장(남한의 소장)까지 올랐다가 2007년 82세로 사망했다.

일부 국내 언론은 ‘숙청설’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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