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연재

장기기증 서약

IMF가 길어지면서 고난의 시간이 계속됐다.

문득 현실에 안주하고 싶고, 적당히 살고 싶은 허접쓰레기 같은 욕심이 생겼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암울한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아주 잠시 들었던 생각이다.

취재현장에 가면 어떤 사람은 “정 기자, 뭘 그렇게 꽉 막혀 살려고 해. 적당히 타협도 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외국으로 이민 갔지만 한때 중견 택배업체를 운영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기 보다는 적당히 어울려 술도 마시면서 살라고도 했다. 소주만 마시지 말고, 양주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기에 나는 “양주 맛을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번은 나를 데리고 서울시내 호텔 두 곳을 연속으로 돌며, 자신이 키핑해 놓았던 고급 양주를 한 잔씩 따라주며 맛을 보라고 했다. 그는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입속에서 조금씩 굴려가며 서서히 목에 넘기라며 ‘양주 음미하는 법’까지 알려줬다. 사실 나는 지금도 양주 맛을 모른다. 술을 마셔도 소주, 맥주, 막걸리가 좋다.

나는 이런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한가하게 양주 마셔가며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나한테는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고, 꼭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었다. 이런 굳건함 속에서도 가끔은 현실에 안주 하고픈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비워야 했다. “나를 버려야 한다” “나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1999년 12월23일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허접한 욕심이 싹 사라졌다.

내 주민등록증 뒷면에는 ‘장기기증 등록증’이 붙어 있다. 유사시(숨을 거둔 경우와 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됐을 때)에 내가 장기를 기증했다는 표식이다.

그래야 장기, 각막 등 유효기간(쓸 만 할 때)이 지나기 전에 적출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색이 바래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스카치테이프로 코팅까지 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죽어서 새 생명을 살릴 수가 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하다. 장기기증 등록은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장기기증 서약을 한지 11년째 되는 2010년 12월 진수희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한테 편지 한 통이 왔다. 장기기증 서약한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다. 그때 ‘장기 기증 등록’이 유효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