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스포츠사회일반

코미디언 심철호 ‘청부 폭행사건’ 미스터리

심철호는 1939년 5월4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심종섭이다.

서울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1969년 동양방송 <웃음의 파노라마>로 데뷔했다. <웃으면 복이와요>, <부부만세>, <유쾌한 청백전> 등에서 주로 서민적인 캐릭터를 맡았다. 턱이 길어 ‘주걱턱’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특유의 입담으로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이기동 등 인기 코미디언들과 함께 70‧80년대를 풍미했다.

심철호는 방송 활동 중에도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을 갖고 헌신적인 활동을 벌였다. 1981년 전화상담 전문기관인 ‘사랑의 전화’를 설립해 운영했다.

연예인이 사회복지사업을 펼치는 것에 대해 ‘일회성 쇼가 아니냐’ ‘정치에 뜻을 두고 하는 일’이라는 등의 말이 돌자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진정성을 보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연예활동을 접고 결식노인, 소년소녀가장, 실직자 등을 위한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되자 ‘노숙자 쉼터’를 개설해 노숙자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벌였다.

1998년부터는 대형버스 1대와 사회복지사, 간호사로 구성된 ‘이동복지관’을 운영하며 달동네 등을 찾아 봉사했다. 좋은부모되기 운동본부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청룡봉사상(1988), 제5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인(仁)상, 국무총리 표창(1998), 문화훈장 옥관장(1999)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휴가 받은 어릿광대>, <중국대륙에 사람을 싣고>, <심철호 중국기행>, <러시아리포트> 등이 있다.

심철호는 지병인 간경화로 몇 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다 2002년 12월2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고인은 경기도 광주 삼성개발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웃음 속에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한 코미디언으로 남았다.

한평생 봉사의 삶을 살았던 심철호는 폭력배들의 피습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심철호 집단 폭행사건’ ‘심철호 피습사건’이다.

1980년 5월30일 저녁 심철호(41)는 일을 마치고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 8시10분쯤, 서울 강남구 반포동 신반포아파트 2동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바로 이어 심철호 차량을 뒤따라오던 하늘색 포니 승용차가 멈추더니 세 명의 남성들이 내렸다.

이들은 다짜고자 심씨를 10여m쯤 끌고 가면서 얼굴과 가슴을 주먹과 발로 집단 폭행했다. 심철호는 저항할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했고 “사람살려”라고 소리쳤다. 심씨의 비명을 듣고 아파트 경비원(38)이 달려오자 괴한들은 심씨를 넘어뜨리고 달아났다. 이중 김아무개씨(21)가 50m쯤 도망가다 경비원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김씨는 경찰에서 “고향 선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먹고 살것이 생긴다’고 말해 폭행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심씨가 연예인 새마음봉사단 단장을 지낸 점 등으로 미뤄 연예인 사이의 파벌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청부폭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나섰다. 전치 2주의 부상을 당한 심철호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경찰 수사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발생 95일만인 9월3일 주범 정아무개씨(43‧연예인새마음봉사단 기획국장)와 하수인 이아무개씨(40) 등 3명을 검거했다.

경찰은 정씨가 하수인들에게 300만원을 주기로 하고 우선 착수금조로 50만원을 주면서 “다시는 연예활동을 못할 정도로 패라”며 폭행을 사주했다고 밝혔다. 범행동기는 연예인 새마음봉사단장을 지낸 심쌔가 ‘건방지게 논다’는 이유였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의 사주를 받은 이씨는 다시 행동대원 김씨와 또다른 김씨 등 4명에게 이돈을 건넸고,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금 출처와 배후관계는 수사하면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은 온갖 의혹만 남긴 채 수사를 종결하고 말았다. 이 사건 최대 의문인 범행동기, 자금 출처, 배후 등 제대로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강남경찰서 수사과장은 언론브리핑에서 “범인들이 새마음봉사단에 충성하기 위해 제 돈을 들여 일을 저지른 것쯤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범행 자금 300만원에 대해 정씨는 자신이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를 팔고 부인이 계를 탄 100만원, 친구에게 60만원을 빌려 마련했다고 주장했으나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더욱이 정씨는 심철호와 어떤 원한관계도 없었으며 집안 형편도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1978년 새마음봉사단 기획국장으로 취직해 월 45만원의 월급으로 부인, 3자녀와 함께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심철호는 폭행 배후로 당시 연예인 새마음봉사단의 S씨 등을 지목했으나 경찰은 이들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범인은 있으나 동기가 모호하고, 범행자금이 오고갔으나 실체를 밝히지 못했으며 배후는 꼬리 짜르 듯 흐지부지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온갖 의혹만 남긴 채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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